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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uliettee Mar 21. 2019

우리는 워킹맘 자매

문득문득 내가 엄마라는 게 와 닿지 않을 때가 있다. 주말에 아기 먹을거리를 만들고 있다거나, 아기 빨래를 널다가, 또는 이렇게 학부모 대기실에 앉아 있다가…  


준이는 이제 어린이집 3주 차이고, 엄마 아빠들로 가득 찼던 학부모 대기실은 이제 나를 포함 4-5명 정도만 남아 있을 뿐이다. 나른한 햇살을 맞으며 자그마한 아이 의자에 앉아 있으니, 나의 첫 어린이집 경험 그리고 언니가 떠올랐다. 




결혼 전 일찍 퇴근한 어느 날, 조카를 픽업하는 언니를 따라 어린이집이라는 곳을 처음 가봤다. 친정집 근처 아파트 1층에 있는 어린이집이었는데, 올망졸망한 신발들과 겉옷들이 빼곡히 들어선 현관, 하이톤의 친절한 선생님들 목소리가 인상적이었던 곳이였다. 언니가 운전하는 차를 타고 어린이집 아파트 주차장에 차를 세웠는데, 언니가 시동만 끄고 내리지 않는 것이었다.  


‘J야 잠깐만. 좀 이따가 가자. 5분 더 있다가 가도 돼.’  


조수석에서 바라본 언니의 얼굴은 피곤이 가득했다. 피부 하나는 끝내주던 우리 언니였는데, 어느새 희미한 주근깨인지 기미인지가 올라와 있고, 얼굴 톤도 어두워져 있었다. 지금 들어가서 데려와도 되지만, 차에서 잠시 시간을 갖고 싶다는 거였다.  


‘뭐야 5분 더 쉰다고 모가 달라져? 내가 가서 데려올 테니까 그럼 차에서 쉬고 있어’  


조카를 데리고 나와 주차장에서 놀려고 했으나, 엄마 차를 발견하고는 차로 돌진하는 조카. 차 안에서 '그럴 줄 알았다...'라는 표정을 잠시 짓던 언니는 함박웃음을 지으며 차 밖으로 나와 조카를 안아주었다.  




언니는 여러모로 나와 다른 인생을 살아왔다. 내가 엄마 말 잘 듣고 공부 열심히 하는 모범생이었다면, 언니는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 엄마와의 충돌을 기꺼이 감수하는 삶을 살아왔다. 그래서 내 학창 시절 떠올리면 그다지 재밌는 기억이 없지만, 언니를 떠올리면 반짝거리는 추억들이 있다.  


예컨대 이런 기억. 초등학교 하굣길에 책가방을 앞으로 매고 가방 주머니 하나에 손을 넣은 채 열심히 걸어가는 언니를 길에서 마주친 적이 있다. ‘언니 가방에 모야?’ 언니는 초롱초롱 빛나는 눈으로 내 손을 끌어올렸다. ‘J야 여기에 손 한번 넣어봐’ 주머니 속에서 느껴지는 부드럽고 따뜻하고 뭉클하게 살아있는 그것! 나는 아직도 그 촉감을 기억하고 있다. 언니는 그렇게 햄스터 한 마리를 우리 집 식구로 데려왔다. 내가 중학교 때는 Westlife라는 영국 남자그룹에 푹 빠졌는데,  Westlife가 내한 공연차 입국하던 날, 한창 학원에서 공부하고 있던 내 손을 끌고 김포공항으로 달려가 수많은 인파 속에서 떼창을 부르게 했다.  


언니는 언제나 밝고, 신나고 그리고 재밌는 뭔가를 궁리하고 있는, 그래서 옆에 있으면 넘치는 에너지를 나눠 받을 수 있는 그런 사람이었다.  


10대, 20대 때는 허구한 날 엄마랑 싸우고, 자기 멋대로 회사 그만두고, 맨날 해외로 나갈 궁리만 하는 언니를 이해할 수 없었다. 하지만 30대에 접어들고, 내가 맞다고 생각한 삶이 방향이 사실 그냥 여러 삶의 모습 중 평범한 하나의 것이라는 것을 깨달으며, 언니의 삶이 다시 보이기 시작했다. 


공부는 싫어해도 외국어는 좋아해서 맨날 팝송 듣고, 일본 애니메이션을 찾아 보더니, 한국에서 대학 입시에 실패하고는 중국으로 떠난다. 중국에서 공부하다가 어느날 캐나다로 떠나 1년간 신나게 일하고 놀다 들어오기도 했다. 중국에서도 이 대학보다는 다른 곳이 낫겠다며며 다른 성으로 이사를 가고, 친구를 도와 작은 사업도 했던 기억이 난다. 엄마 아빠 등쌀에 못 이겨 한국으로 돌아와 대기업에 취직했지만, 이내 대기업은 자기와 맞지 않는다며 중국어 교육 석사를 하겠다고 다시 중국으로 갔다. 


지금 생각해 보면 언니는 자신이 좋아하는 거, 자신한테 잘 맞는 것이 뭔지를 10대, 20대 동안 치열하게 찾아왔다. 내가 내게 주어진 옵션들, 남들과 비슷하게 가는 인생 중 거기서 좀 더 잘해보겠다고 아등바등 살아오는 동안, 언니는 새로운 자기만의 길을 개척해 나갔던 것이었다. 




하지만 그렇게 반짝반짝 빛나던 언니도 결혼과 함께 조카들이 생긴 이후로 조금씩 바뀌었다. 어느 날 저녁 퇴근하고 돌아온 나에게 잠깐 밖에 나가자며 엄마에게 조카들을 맡기고 동네 카페에 갔다. 언니가 좋아하는 딸기 빙수를 테이블에 올려놓고, 언니는 내 앞에서 펑펑 울었다.


'나 진짜 너무 힘들어.' 


당시 미혼이었던 나는 언니에게 해줄 수 있는 얘기가 별로 없었다. 그냥 이야기를 들어주고 위로해 줬을 뿐. 자유로운 영혼인 우리 언니 인생에 돌봐야 할 여러 사람들이 생기면서 언니가 힘들구나... 그렇게 이해했던 것 같다. 그렇게 우리 언니도 엄마가, 아내가 되었구나 라고 생각했다. 


그러던 어느 날, 언니에게 전화가 왔다. 나는 결혼해서 친정과는 떨어진 곳에 살고 있었다. 


'J야, 나 중국어 공부방 열면 어떨 거 같아?' 


언니 목소리는 20대의 그 설레는 목소리로 돌아와 있었다. 재밌는 계획을 세울 때마다 언니는 나에게 흥분된 목소리로 전화를 했었다. 'J야, 우리 둘이 터키 여행 갈래?' 'J야, 나 캐나다 가면 어떨까?' 'J야, 우리 엄마 생일 선물로 몰래 강아지 사 올까?' (이 강아지는 다음 날 바로 주인에게 돌아갔고, 우리는 주인에게 엄청난 원망과 비난을 받았다).  


언니는 집 근처 주택가에 작은 공간을 마련했다. 공부방 이름을 짓고, 어린이집 친구 엄마 중 디자인하는 엄마를 통해 간판 디자인을 완성, 친한 동네 엄마들을 불러 모아 뚝딱뚝딱 공간을 꾸미고, 학습 프로그램을 짜고, 전단지를 만들어 아파트와 어린이집에 뿌렸다. 그렇게 몇 달 만에 언니의 공부방이 완성되었고, 언니는 워킹맘이 되었다. 




언니의 공부방은 그럭저럭 운영되고 있는 것 같았다. 아이들 중국어 수업만으로는 수요가 모자라다며 (아직도 우리나라는 영어가 우선이라며 툴툴거렸다), 엄마들을 대상으로 기초 영어 수업도 같이 한다고 한다. 첫째 조카 유치원 방학이 되면 동남아 어느 나라에 가 한 달 살기를 하고, 각 나라에 퍼져있는 중국 유학 시절 친구들을 만나러 두 아들을 데리고 이 나라 저 나라를 돌아다닌다. 언니의 요새 최고 관심사는 캐나다 이민이다. 이민 박람회도 다녀오고, 가서 형부는 뭘 시키면 좋을지, 아이 학비 지원을 받기 위해 본인이 대학원을 다녀야겠다며 또 이거 저거 알아보는 중이다. 


반짝반짝 빛나는 우리 언니. 할머니가 되어도 언니는 뭔가를 꿈꾸고 계획하며 나한테 전화할 것 같다. 그땐 나도 언니도 각자의 가정에서 좀 해방되어 다시 재밌는 자매 타임을 보낼 수 있겠지. 다음번엔 내가 재밌는 소식을 갖고 언니에게 전화를 걸었으면 좋겠다. 


'언니 나 동네 아줌마들이랑 재밌는 거 한번 해보려고!'




반짝반짝 빛나는 언니의 인생을 응원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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