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부모님은 어렸을 적부터 나보고 이거 하라 저거 하라 하는 스타일이 아니었다. 진학도, 취업도, 결혼도 내가 결정하는 대로 믿고 맡겨주셨다.
그랬던 우리 부모님이 딱 한 때, 내가 대학 다니는 동안 넌지시 던지는 말이 있었다.
‘고시 보는 거 어때?’
당시 꿀 같은 대학생활을 즐기고 있던 나에게 고시 = 신림동 = 재미없는 생활이었고, 한치의 고민도 해보지 않은 옵션이었다. 나는 답답한 공무원 생활, 틀에 박힌 일만 하는 전문직 일보다는 사기업판에서 글로벌을 무대로 내 꿈을 펼칠 거야!라는 주장을 펼치며 번번이 엄마의 제안을 웃어넘겼다.
하지만 나이가 30이 지나고, 가정이 생기고, 회사 판의 논리를 배워갈수록 아빠 엄마가 왜 그때 나에게 그런 제안을 했었는지 깨닫고 있다.
회사에 입사하여 어느 순간까지는 그냥 나한테 주어진 일만 성실하게 잘하면 된다. 남들보다 조금만 시간과 노력을 더 쏟으면, 조직에서 좀 더 돋보이는 사람이 될 수도 있다. 여자, 남자 구분도 그때는 별 의미가 없다.
하지만 연차가 쌓이고, 회사일이 내 일만 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는다. 회사일은, 내가 한 일을 더 그럴듯하게 포장하여 남들에게 알리고, 내 의사가 관철되도록 상사와 타 부서 사람들을 설득해야 하며, 이를 위해 때로는 상대방과 기싸움을 해야 하고, 팀원들의 노력을 모아 팀의 결과물을 만들어 내야 하고, 우리 팀/나의 성과를 위해 다른 사람들을 적절하게 활용하는 일들을 포함하는 것이다. 간단히 말하면 리더십도 필요하고 정치도 해야 하는 것이다.
여기서부터 본질적인 고민이 시작된다. '내가 이러한 일들을 하며 조직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가?' 아니 이 조직이 아니라 다른 어느 조직에서라도 살아남을 수 있는가?
이런 심오한 고민에 빠져 있을 때, 집에는 어린이집에 적응 못한 아이와 가사와 육아에 좀 더 신경 써 주길 바라는 남편이 있다면, 이를 헤쳐 나가 보겠다는 의지는 점점 꺾여간다.
그러면서 엄마가 대학생이었던 나에게 했던 말들이 떠오른다.
전문직/공무원
대체 가능하지 않은 전문적인 지식과 스킬을 갖고 있기 때문에 그냥 ‘내 일’만 해도 되는 일. 진로 고민 딱히 안하며 나라에서 부여해 준 힘으로 아쉬운 소리 안하며 '내 일'을 하는 일.
‘아… 그래서 그때 엄마가 고시를 보라고 했구나’
못난 딸내미는 오늘도 깨닫고 갑니다.
그때 내가 고시를 봤더라면, 의대/의전을 갔더라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