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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uliettee Apr 19. 2019

사우나 힐링기

20대에는 사우나를 참 좋아했다.  


두 시간 동안 머리 끝부터 발끝까지 내 몸 구석구석을 닦아내고, 땀을 내며 노폐물을 빼주고, 각종 팩으로 몸 여기저기에 영양을 더한다. 평소에는 잘 보지 않던 발가락 하나하나까지 세밀하게 들여다보고 나면 왠지 내가 더 소중하고 아름답게 느껴졌다.   


대부분의 손님이 아줌마들 그리고 할머니들인 사우나 안에서, 나는 나의 젊음을 온몸으로 뿜어냈다. 팔뚝과 허벅지에 덕지덕지 붙은 군살들, 끝을 모르고 흘러내린 엉덩이 살, 양손으로 둘러도 두 손이 닿지 않을 것 같은 육중한 뱃살. 이런 제각각의 몸뚱이들 속에서 나는 탄탄한 허리라인, 통통하게 살이 붙은 동그란 엉덩이, 가느다란 팔뚝을 뽐내며 사우나 안을 활보했다.


그때는 세상의 중심이 나였다.  


결혼 후 이사 온 동네에는 희한하게도 사우나가 없었다. 그렇다고 운전을 해서 옆동네 사우나를 가고 싶지는 않았다. 사우나란 슬리퍼 질질 끌고 갔다가 마르지 않은 머리를 두 손으로 툭툭 털어가며 집까지 슬슬 걸어오는 게 제 맛 아니던가. 어쩌다 친정에 갈 때도 친정에 왔는데 혼자 사우나 가냐 라는 소리를 듣기 싫어 가지 않았다. 그러다 임신을하고 아이를 낳자 더더욱 갈 수 없는 곳이 되었다.  





남편이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사우나를 다녀오라고 한다. 지난주 혼자 회식에 운동에 주말에는 골프까지 치고 온 게 마음에 걸렸나 보다. 이렇게 기회가 생겨도 머릿속에서는 오만 생각이 소용돌이친다.  


‘혼자 애기 보면 남편은 누워서 티브이를 보고 애 혼자 놀겠지’ ‘주말이라도 부모랑 상호작용하며 놀아야 하는데 2시간 날리는 거 아냐’ ‘김이랑 대충 밥 먹일 거 같은데 한 끼를 소홀하게 넘기는 거 아닌가’ ‘사우나에 뭘 챙겨가야 하지? 샴푸린스 샘플 남아있는 게 있던가’   


이내 머리를 흔들며 남편이 생각을 바꿀세라 ‘오케이!’를 외치며 간단한 짐만 챙겨 집을 나선다.  


입구에서부터 느껴지는 사우나 특유의 웅성거림이 들린다. 따뜻하고 촉촉한 물 냄새 증기 냄새. 킁킁 냄새를 맡아본다. '오랜만이야 사우나'. 순식간에 옷가지를 벗어던지고 탕 속에 몸을 넣는다. 살짝 소름이 돋으면서 물과 내 몸이 온도를 맞춰 가는 시간. 내 몸의 온도는 탕 위 온도계가 가리키는 온도로 바뀌고 내 몸뚱이는 물과 하나가 된다. 물속으로 녹아내릴 것 같은 편안하고 노곤한 느낌...


세신 아주머니와 약속한 20분 안에 물속에서 몸을 뿔리고 사우나에 들어가 땀도 한번 빼야 한다. 마음이 급하다. '30분 후에 민다고 할걸...'


이번엔 습식 사우나다. 문을 열고 들어가는 순간 뜨거운 공기가 코와 입으로 들이쳐 숨을 쉬기 힘들다. 이때 특효약은 몸을 낮추는 것. 재빨리 더듬어 하얀 공기층을 피해 바닥에 앉는다. '휴우' 이제 숨 쉴만하다. 무거운 몸뚱이를 축축한 바닥에 눕힌다. 뜨끈한 돌바닥에 엉덩이 허리 등 다리가 착하고 달라붙는다.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 몸을 아무런 경계 없이 당당하고 편안하게 남 앞에 눕힐 때의 해방감이란!  




아기가 태어난 이후, 샤워조차 맘 편하고 느긋하게 즐긴 적이 한 번이라도 있었던가. 매일 하던 샤워를 이틀에 한번 삼일에 한번, 갓난아기와 둘이 집에 있을 때는 일주일에 한 번 한 적도 있다. 아기가 좀 크고 복직을 하고 나서는 샤워할 시간에 잠을 10분 더 자고, 아이랑 10분 더 놀아주는 게 이득이라는 셈을 했다. 샤워를 하면서도 빨리 하고 나가서 정리해야지, 아기 씻겨야지, 먹여야지 하는 생각에 몸은 샤워를 하고 있지만 마음은 계속 부엌과 거실에 머물러 있었다.


몸에 난 각종 털 정리도 대충대충 남의 눈에 띄지 않을 정도로만, 손톱 발톱의 큐티클도 생기든지 말든지, 헤어팩은 고사하고 린스라도 하고 나오면 다행. 임신 때부터 입던 가슴에 지퍼 달린 원피스 두세 벌과 까만 레깅스가 내 전용 실내복이다. 치렁치렁한 잠옷은 아기 밥 먹일 때 국에 담가지기 십상, 아기 콧물이나 손에 뭍은 지지를 손쉽게 닦아내기에도 튼튼한 면으로 된 원피스가 제격이다. 이런 실정이다 보니 내 몸은 그저 하루하루 일하고 가정을 굴려내는 도구가 되어버렸다.


사우나 안에서 의식적으로 집 생각, 아기 생각을 하지 않으려 노력한다. 지금 이 기분, 이 느낌에만 집중해야지. 홀딱 벗은 내 몸과 증기에 둘러 쌓인 있는 이 순간을 즐기자.

 



세신 아주머니들은 왜 레이스 브래지어를 입는 것일까? 땀과 물이 잘 통하고, 빨리 마르는 소재니까.라는 나름의 답을 내어본다. 아주머니는 뜨거운 물에 흠뻑 적신 수건을 내 배 위에 올려놓는다. '아 좋다...' 온몸에 때 비누를 바르고 본격적으로 세신이 시작된다. 슥슥 삭삭. 좀 따가운데 부드러운 수건으로 바꿔달라고 할까? 아니야 오랜만이니 거친 걸로 밀자 내가 좀 참지 뭐.


아줌마의 살과 내 살이 순간순간 닿는다. 물에 축여진 남의 살에 닿는 이질적인 기분. 그것도 손이나 얼굴처럼 드러난 곳이 아니라 아줌마의 뱃살, 처진 팔뚝살에 내 팔꿈치, 어깨가 닿는다. 내 맨 몸을, 지저분한 맨 몸을 자연스레 남에게 펼쳐 놓는다. 이런 이질적인 경험이 일상처럼 일어나는 이 곳 침대 위.


'그때 그 아줌마는 관두고 어디로 갔대?'

'도시락 싸는데 갔는데 아후 말도 마. 불 앞에서 일하느라 엄청 힘든가 봐'

'에휴 음식 하는 데가 다 그렇지 뭐. 자기는 아직 가지 마 거긴 60 지나고 가도 되'

'그지? 난 여기서 하다가 나중에 가락시장에 가지 뭐. 그때 간 언니 50대 초반인 게 거기 가니까 막내 더래~'

'그래? 근데 가락시장 일 힘들다던데, 장사하는 사람들이라...'


무슨 얘기들을 나누시는 건가 찬찬히 듣다 보니, 세신 아주머니들의 커리어 고민이다. 이 쪽 일 하는 아주머니들 간에도 커리어 패스가 있는 것 같다. 주거 지역에 있는 사우나 세신이 젤 좋은 일, 거기서 나이가 많아져 밀리면 좀 험한 동네 세신, 거기서도 안되면 도시락 싸는 일. 여기는 다른 것보다 '나이'가 중요한 factor 인 듯하다.




요 근래 회사 고민, 육아 고민으로 마음과 몸이 힘들었다. 급기야 오늘 아침에는 빵 한 조각을 먹은 것이 그대로 가슴에 걸려 몇 시간째 두통에 시달리고 있는 중이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사우나에 와서부터 천천히 두통이 사라져 가고 있었다. 세신이 끝날 때 즈음이 되자 두통은 씻은 듯이 사라지고 없었다. 마사지사들이 남의 몸에 마사지를 해주는 건 자기의 에너지를 나누어 주는 거라고 하던데 세신도 비슷한 걸까?


마지막으로 온몸에 비누칠을 듬뿍 해주고 나서 아주머니는 나를 능숙하게 일으켜 세워 미끄러지듯 땅으로 내려 보냈다. 비틀비틀 내 자리로 돌아와 거품을 씻어내고 정성스레 머리를 감았다. 여행 키트 어딘가에 처박혀 있던 헤어팩을 꺼내 정성스레 머리칼에 바르고, 각질 팩을 뜯어 얼굴 위에 올렸다. 퉁퉁 불은 발톱의 큐티클도 손톱으로 슬슬 벗겨냈다. 벌써 집을 나온 지 한 시간 반. 이제 돌아갈 때가 된 것 같다.


대충 수건으로 말린 머리를 손으로 털어내며 바깥으로 나왔다. 살짝 차가운 바람. 하지만 한 시간 반 동안 사우나의 뜨거운 공기를 머금은 나의 몸 덕분에 추위는 느껴지지 않는다. 사우나에 들어갈 때 눈에 들어오지 않던 상가, 학원, 아파트들이 눈에 들어온다. '자 이제 어디서 버스를 탄다...'


남편에게 전화가 온다.


'나왔어? 버스 정류장 찾는다고 헤매고 다니지 말고 그냥 택시 타고 와. 머리도 안 말리고 나왔을 텐데 감기 걸려'


웃음이 나왔다. 이게 이 남자가 나를 사랑하는 방법이겠지. 이 한마디에 나는 또 일주일을 버틸 에너지를 얻는다. 얼른 집에 달려가야지. 집에가서 이제 수유복은 좀 집어 넣고 이쁜 잠옷 좀 찾아봐야겠다. 눈에 안보인지 한참인데 찾는데 시간이 좀 걸릴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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