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반대의 경제관념을 가진 부부
남편과 나는 다른 점이 참 많지만 그중 가장 중요한 것 중 하나가 바로 '돈'에 대한 생각이다.
사소하게는 마트에서 어떤 고기를 살 것이냐 에서부터, 한 달 소득의 얼마를 저축할 것인지, 노후 대비는 어떻게 할 것인지에 대한 것 까지 남편과 나는 매우 다르다.
결혼 전에 남편과 연애하며 몇 가지 놀랐던 에피소드가 있다. 친정을 함께 방문한 적이 있는데 남편이 내 조카들에게 아이스크림을 사주겠다며 데리고 나갔다. 친정집 바로 옆에는 GS 편의점이 있었고, 횡단보도를 하나 건너 조금 걸으면 CU가 있었다. 나는 자연스레 아이들 손을 잡고 바로 옆에 있는 GS 편의점을 향했다. 그때 남편이 횡단보도를 건너 CU까지 가자는 것이었다. 알고 보니 남편은 SK 텔레콤 유저로 CU에서만 T멤버십 10% 할인을 받을 수 있던 것이었다. 아이들 아이스크림에 과자까지 3000원 남짓, 우리는 300원을 할인받을 수 있었다. 당시에는 '꼼꼼하네~'라고 대수롭지 않게 지나갔지만 지금 생각해 보면 남편의 경제관념을 보여주는 중요한 사건이었다. 지금도 우리는 SK 텔레콤 할인이 되는 CU편의점을 이용하고, 한 사람이 하루에 두 번 갈 일이 생기면 서로의 T멤버십 바코드를 캡처해 사진으로 보내주어 두 번 다 할인을 받는다. 하루 세 번 이용은 절대 하지 않는다.
두 번째는 면세점 사건이다. 결혼식 스냅사진을 찍으러 하와이에 가기로 한 우리는 여행 일주일 전 면세점 쇼핑을 하기 위해 명동 롯데 본점을 방문했다. 남편은 결혼 선물 겸 필요한 것을 사준다며 평소에는 사지 못하는 비싼 브랜드에서 이것 저것을 고르게 했다. 그런데 쇼핑하는 내 뒤에서 남편이 계속 종이들을 부스럭 거리며 분주한 것이었다. 급기야 몇 군데 쇼핑을 하고는 잠시 정비의 시간이 필요하다며 면세점 내 의자에 앉았다. 뭐가 그렇게 바쁜가 들여다보니 남편이 카드사, 면세점 바우처 등 이곳저곳에서 적용해 주는 할인과 쇼핑한 영수증들을 계산하며 최적의 쇼핑 방법을 찾아내고 있는 것이었다. 나는 박장대소를 하며 '아니 면세점 쇼핑이 이렇게 복잡할 일이야?'라고 놀렸지만 이 또한 남편의 경제관념을 알려주는 중요한 사건이었다. 약 한 달 반 뒤 9월, 우리는 늦은 여름휴가를 떠날 계획인데 남편은 어젯밤 롯데 면세점 앱을 훑어보며 나에게 말했다. '이번 면세점에서는 네 화장품과 가방을 하나 살 거니까 생각해 놔.... 토리버치는 어때? 프라다가 더 좋아?' 분명 뭔가 할인 상품이 올라와 있었을 것이다.
반면, 나는 경제관념이 남편만큼 철저한 편은 아니다. 편의점 할인을 받으면 좋지만 더운 날 생수 한 병을 사기 위해 한 블록 더 걸어가 몇 백 원 할인을 받는 것보다는, 바로 앞 편의점에서 제 값 주고 사 먹어도 괜찮다. 면세점에서 할인폭이 큰 비싼 화장품을 하나 사는 것 보다 중저가 브랜드 화장품 2-3개를 사는 것이 더 좋다. 그리고 그게 일정 금액 이상이 되지 않아 추가 할인을 받지 못한다면 뭐 어쩔 수 없는것이다. 기분 전환을 위해 예쁜 카페에 가서 커피와 스콘 하나를 시켜 놓고 음악을 듣기도 하고, 마트에서는 할인 적용이 되는 미국산 스테이크 보다, 오늘 구워 먹고 싶은 (할인이 없는) 항정살을 카트에 집어넣는 사람이다. 이런 여자가 저런 남자와 살다 보니 갈등이 없을 수가 없다. 결과적으로 난 우리 집안에 경제권이 없다.
내가 받는 월급은 내 카드값을 제외하곤 다 남편의 계좌로 이동한다. 남편은 그 안에서 필요한 생활비를 지출하고 저축과 재테크를 한다. 온라인 장보기, 아이 장난감, 기저귀, 분유도 내가 필요한 것을 말하면 남편이 찾아서 구매하는 식이다. 지난주에는 아이 먹을 고기가 떨어져 아이를 등원시키고 급하게 이마트를 갔는데, 남편 없이 마트에서 혼자 장을 본 것이 결혼 후 처음인 것을 깨달았다. 장을 보는 동안 남편에게 두 번 전화를 했다. 돼지 등갈비 100g에 2800원이면 시세가 괜찮은 것인지, 이마트 포인트 카드에 어떻게 적립을 하는 것인지.
결혼을 하고 난 다시 한번 깜짝 놀랐다. 남편은 가계부를 쓰고 있었는데 보통 사람들이 수입과 지출을 관리하는 용도로 가계부를 쓴다면, 남편은 거기에 대차대조표까지 정리하며 가계부를 쓴다. 전체적인 자산 밸런스를 관리하고, 이번 달 지출이 많으면 다음 달로 이월시켜 다음 달 지출까지 관리한다. 만기가 다른 적금을 몇 개씩 들어 놓는데 이것들의 만기가 이미 내년 가계부에 반영되어 있다. 재테크도 국내외 주식, 부동산, 보험, 연금 뿐 아니라 심지어 '계' 도 하고 있었다. 남편의 경제관념은 단순히 돈을 쓰는 것, 모으는 것이 아니라 돈을 어떻게 쓸지에 대한 철학과도 연결되어 있다. 돈을 쓸 때는 제대로 크게 쓰되 허투로는 1원도 쓰지 않는다. 다른 사람에게 돈을 쓸 때에도 나름의 기준과 방식이 있다. 인생에서 도달하고 싶은 부의 목표가 있고, 그것을 달성하기 위한 플랜도 지속적으로 minor tunning을 하며 머릿속에 그리고 있다.
이런 남편이었기 때문에 나와 '돈'에 대한 갈등이 일어날 수밖에 었었을 것이다. 생각해 보면 남편이 나를 '개조'하기 위해 알게 모르게 많은 노력을 기울였던 것 같다. 강남 어느 스터디 카페에서 하는 '경제적 자유' 강의를 나까지 신청해 같이 듣기도 했고, 증권사 PB에서 초청하는 세미나에도 나를 꼭 데려가곤 했다. 연말정산 때가 되면 백화점 문화센터 '연말정산 따라잡기' 강좌를 신청해서 나만 듣게 했다 (본인은 이미 빠삭하므로...). 문제는 내가 이런 강의를 들어도 '젊은이들이 점점 직장에 목매지 않겠군...', 중국 주식 세미나를 들어도 '중국 심천이 제2의 실리콘 밸리가 되겠어..'라는 식의 생각만 할 뿐 오빠가 원하는 깨달음을 얻지 못했던 것.
경제관념이라는 건 그 사람이 인생에서 추구하는 바와도 깊이 있게 연관되어 있기 때문에 부부가 그 뜻을 함께 하지 않는 다면 둘 다 피곤해진다는 것을 경험적으로 깨달았다. 물건 하나를 사는데에도, 휴가 계획을 세우는 데에도 사사건건 부딪힌다. 서로를 각자의 프레임에 넣어 바라보기 때문에 말 한마디에도 예민하게 반응한다. 하지만 부동산 투자, 남편의 사업과 같은 우리 가정의 굵직한 일들이 일어나고 있는 올해, 이제는 우리 부부가 좀 더 합을 맞춰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남편도 내가 휴직을 하며 시간적 여유가 생겼다고 생각했는지 집안 경제에 대한 논의를 좀 더 해온다. 그리고 나는 결심했다. 남편에게 맞춰 보기로.
난 여전히 미래에 대한 준비를 위해 일상의 즐거움을 놓치고 싶지 않고, 돈으로 기분을 살 수 있다면 기꺼이 돈을 지불하며 살고 싶다. 돈이 중요하지만 돈보다 중요한 것들이 많아 그것들에 더 무게를 두며 살고 싶다. 하지만 남편이 어떤 인생의 목표를 갖고 있는 지를 알고 있고, 이것이 남편에게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를 알기 때문에 나도 한번 남편처럼 되어 보기로 했다.
이제 남편이 내 준 숙제하러 가야겠다. 미국 테크 기업 중 어디에 투자하면 좋을까. 오늘 다섯 종목은 더 발굴해야 하는데... 왠지 오늘도 리서치하다 딴데로 빠질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