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치동은 무엇인가, 라이딩은 무언인가, 그리고 엄마의 인생은 무엇인가.
우연히 소개받은 '라이딩 인생 - 대치동으로 간 클레어 할머니'라는 책.
라이딩, 대치동이라는 소설과는 어울리지 않는 소재가 등장하여 가볍게 읽어볼 요량으로 빌려 보았다. 줄거리는 워킹맘이 딸의 학원 라이딩을 도서관 사서 일을 하는 친정엄마에게 부탁하게 되면서 생기는 이야기. 일 하면서 딸 하나 잘 키워보겠다는 애쓰는 열혈 엄마와 아이는 이렇게 키우면 안 되는데...라는 생각을 갖고 있는 친정엄마. 전업맘과 워킹맘간의 갈등, 손주, 손녀룰 봐주는 할머니들의 고된 삶 등 현실감 있는 소재를 소소하고 재밌게 풀어냈다.
'엄마들은 대부분 결의에 차 있었고, 아이들은 이전에 와봤는지 여부에 따라 반가움과 신기함이 교차하는 표정이었다.'
어린이 도서관 사서로 일하는 친정 엄마 지아가 보는 도서관 풍경이다. 집 앞 지척에 있지만 아이가 태어나기 전에는 '저런 건물이 있구나' 정도로 지나 만 다니던 판교 어린이 도서관은, 이제 아들과 나의 주 놀이터가 되었다. 20개월 아들은 책에 별 관심을 보이지 않아 책꽂이 사이를 뛰어다니며 잡기 놀이를 하거나 숨바꼭질을 하는 것이 대부분이지만, 이렇게라도 도서관과 책에 좀 더 익숙해 지기를 바라는 게 나의 속마음이다. 방학이 되자 도서관에 아이들과 엄마가 부쩍 많아졌다. 엄마들은 손에 커다랗고 파란 코스트코 쇼핑백이나 바퀴 달린 네모난 박스를 끌고 다니며 십여 권의 책을 빌려간다. 그리고 그 엄마들의 눈빛은 책의 표현처럼 '결의'에 차 있다. 주말이 되면 아빠들까지 가세하여 바닥, 의자, 소파 할 것 없이 아이들을 끼고 앉아 열심히 책을 읽어준다. 그중에는 유창한 영어 발음을 구사하는 아빠들도 있어 깜짝깜짝 놀라곤 한다.
아직 아이가 본격적인 학습을 할 나이가 아니라 저런 엄마들과 아이들의 모습이 남 일처럼 보이지만 나도 아이가 크면 달라질까? 돌잡이 전집과 몬테소리 교구에서 시작하여 한글, 영어, 숫자 배우기를 지나 본격적인 '교육'이 시작되는 때가 오면 나는 어떤 엄마가 되어 있을까?를 상상하며 책장을 넘겼다.
'대치동'
내가 대치동을 처음 접해 본 건 고등학교 때였다. 서울 변두리 지역에서 살다 특목고를 가면서 대치동 출신 아이들을 알게 되었다. 그 아이들은 학원을 참 많이 다녔다. 학교 수업이 끝나고 자습을 하는
대신 학원을 갔고, 서랍 속에는 학원에서 직접 만든 문제집과 프린트물들이 빼곡했다 그 애들 엄마들은 교문 앞에 차를 대고 기다리다 아이들을 픽업해 학원으로 대려갔다. 한 번은 팀 과제를 하기 위해 대치동에 사는 친구네 집에 간 적 이 있는데 (은마 아파트로 기억한다), 거실 이곳저곳 에 문제집과 프린트 물들이 수북이 쌓여 있던 기억이 난다. 이 아이는 엄마는 대치동 학원가 국어 선생님이었다.
이 책을 읽게 된 이유 중 하나가 '대치동'에 대한 궁금증 때문이기도 했다. 도대체 대치동이 뭐길래 그 동네는 아파트 값이 떨어질 줄을 모르고, 기차를 타고 지방에서 대치동으로 학원 유학을 가는 것일까. 그리고 무엇보다... 그 속에서 라이드를 해주는 엄마들의 인생은 어떤 모습일까?
이 책을 읽고 그 궁금증이 어느 정도 해소되었다. 엄마들은 아이들을 학원에 데려다주고, 학원에 있는 대기실에서 아이들을 기다린다. 그리고 쉬는 시간이 되면 준비해 온 간식을 먹여준다. 대기실이나 카페에서 학원 수업, 선생님, 과외, 학교에 대한 정보를 나누고, 필요하면 학원에 건의도 한다. 수업이 끝나면 아이를 데리고 다음 학원으로, 다음 스케줄이 없는 날에는 레고 방, 놀이공원 같은 곳에 아이들을 데려간다. 엄마는 아이의 연간 진도 계획을 꿰뚫고 있으며, 아이의 시험 결과에 따라 영어 라이팅을 보강해 주고, 수학도 유형을 바꿔가며 공부를 시켜준다. 새로 뜨는 학원, 잘 가르친다는 선생님 정보를 계속 업데이트하여 정리한다. 이렇게 한다면 엄마도 밖에서 일하는 것만큼 바쁠 것 같다. 그리고 아이 교육에 관심을 가지면 가질수록 점점 그 속에 깊이 빠져 들게 되겠지. 사립초등학교 입학, 중고등학교 내신, 자사고, 그리고 최종 목표인 입시까지 엄마는 아이의 손을 잡고 같이 달릴 것이다.
대치동에 살던 그 친구는 결국 SKY를 들어갔고, 졸업 후 지방 로스쿨에 들어갔다. 변시에 한 번 떨어졌다는 소식은 들었는데 그 후 들려온 소식은 결혼, 그리고 두 아이의 출산이었다. 나도 SKY를 들어갔고, 졸업 후 취업 그리고 지금은 애를 낳고 휴직을 하며 또다시 진로 고민을 하고 있다. SKY를 나온 대부분의 여자 지인들은 회사/기관에서 일을 하거나, 일을 그만두거나, 공부를 하고 있다. 남자들 역시 대부분은 회사/기관에서 일, 그중에는 MBA를 가거나 전문 대학원에 진학하여 남들보다 조금 더 돈을 잘 버는 일을 하고 있는 사람들도 있다. 아주 소수이긴 하지만 창업을 하여 회사를 키우고 있는 사람들도 있다.
일단 공부를 잘하고 나야 그다음에 뭐라도 할 수 있는 길이 생기는 것일까? 그래서 엄마들은 기꺼이 대치동 인생을 사는 것일까? 아이들이 좋은 직장, 괜찮은 직업을 갖고 나면 그럼 엄마는 '그래 내가 고생한 보람이 있군'이라고 생각하며 다시 자기 인생을 살게 되는 것일까?
얼마 전 만난 아이 셋 키우는 워킹맘 한 명이 강남으로 이사 갈 계획을 얘기하며, 어차피 본인이 아이들 케어를 제대로 못해줄 것 같으니 뺑뻉이 돌리기 쉬운 대치동이 자신에게는 더 좋은 옵션이라는 얘기를 했다. 회사에서 같이 일하던 국내 3대 로펌 중 하나의 파트너 변호사님이 알고 보니 대치동 돼지아빠라는 얘기를 우연히 듣게 되었다. 아이들 학습 계획은 물론 학원에서 학부모 대표(?) 같은 역할을 맡으며 대치동 학원가에 큰 영향을 발휘하고 계신다고 한다. 일하시는 스타일로 봤을 때 아이들 교육도 체계적이고 꼼꼼하게 잘하실 것 같고, 학부모회의에서도 뛰어난 말솜씨로 사람들을 휘어잡을 것 같다. 그리고 학부모 모임에 나오는 병원장 아빠에게 큰 일 한 건을 수임받으셨다고 한다.
다양한 이유에서 대치동은 사람들에게 가고 싶은, 가볼 만한 곳인가 보다.
공부는 어찌 되었건 혼자 하는 것이고, 본인의 의지가 가장 중요한 것이라고, 교과서를 외우는 것보다는 생각하고 쓰고 혼자 힘으로 무언가를 만들어 내는 것이 더 멋진 일이라고, 학교에서 공부만 하는 것이 아니라 운동도 꾸준히 하고, 악기 하나 다룰 줄 아는 것이 인생을 더 풍부하게 사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아이에게 혼자만의 시간을 충분히 주고, 스스로 결정할 수 있게 해 주고, 하고 싶을 것을 찾을 때까지 기다려 주는 것이 부모의 몫...이라는 건 아직 20개월 아기를 키우는 엄마의 철없는 생각일까?
그런데...도서관 신착 도서 중 우리 아들이 갖고 있지 않은 자연관찰 전집을 몇 권 대여해서, 세이펜에 MP3를 다운로드하고 있는 나는 혹시 라이딩 인생을 준비 중인 엄마인 건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