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질문을 며칠 동안 머릿속 한 켠에 품고 있었다.
가장 자주 그리고 쉽게 떠올린 대답은 '재밌어서'이다. 하나하나 생각의 타래를 풀어내고, 내 생각과 느낌을 잘 표현할 수 있는 단어를 고르고, 완성된 글을 수차례 읽어보고. 그리고 이를 다른 사람들과 공유하며 그들의 피드백도 들을 수 있는 과정이 재밌기 때문에 내가 글을 쓴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글쓰기가 재미있지만은 않다. 어떨 때는 무슨 주제로 써야 하나 며칠을 고민해도 떠오르지 않고, 이 글감 저 글감 건드려만 봤다 포기한 글들이 작가의 서랍에 수북이 쌓여있다. 문장을 하나하나 완성하는 것도 내 생각이 제대로 표현되지 않아 지웠다 다시 썼다, 문단을 바꿀까 말까. 고역이 아닐 수 없다. 그리고 세상에 글쓰기보다 쉬우면서 재밌는 건 무수히 많다. 버튼 몇 번만 누르면 나를 새로운 세계로 데려다주는 넷플릭스, 소파에 누워 과자 바구니를 옆에 끼고 읽어 내려가는 베스트셀러 소설들. 이런 쉬운 재미를 두고 굳이 어려운 재미를 찾는 이유는 뭘까.
나는 기억을 잘 못하는 편이다. 아기 낳고 나면 다 그래~ 나이 들면 다 그래~라고 말하지만 나는 그것보다 좀 더 기억을 못 하는 편인 것 같다. 남편이 말해준 이번 주 스케줄도, 과거에 다녀온 식당들도 잘 까먹어서 남편에게 핀잔을 듣기 일쑤다. 여행지에서 뭐 했는지 기억 못 하는 나를 두고 남편은 '그냥 파리에 다녀왔다고 생각해. 어차피 기억 못 하니까 다녀온 걸로 쳐~'라고도 한다. 나는 왜 기억을 잘하지 못할까? 난 과거를 명사와 동사가 아닌 형용사로 기억하는 성향이 있는 것 같다. 예컨대 이런 것이다. 남편과 멜버른 여행을 다녀온 적이 있다. 여행 후 남편이 기억하는 방식은, 첫날 우리가 어느 장소들을 갔고, 저녁 식당은 어떻게 예약을 한 것이고, 음식의 가격대는 어떠했고 등 사실과 시간적 흐름에 따라 기억을 한다. 반면 나는 디테일한 시간적 순서와 가격 이런 것은 잘 기억하지 못한다. 멜버른은 커피를 좋아하는 내가 가자고 졸라서 갔던 도시인데, 건물과 건물 사이에 있는 아주 작은 커피숍이 강렬하게 기억 속에 남아 있다. 갈색 톤의 간판과 차양, 시끄러운 커피 머신 소리와 티브이 소리, 가게 안을 가득 채운 진한 커피 향기. 그리고 커피를 받아 작은 가게 문을 나왔을 때 느껴졌던 새벽의 서늘하고 축축한 공기. 그 공기와 커피 향 그리고 지저분하고 오밀조밀한 도로가 만나서 만들어 내는 멜버른이라는 도시의 느낌을 난 기억 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멜버른에서 우리가 뭘 했지?라고 하면 나는 대충 기억나는 대로 음.. 미술관, 큰 강, 보태니칼 가든, 카페....?라는 대답 밖이 나올 수 없는 것이다.
느낌으로 기억하기 때문에 불리한 것이 참 많다. 남편과의 말싸움도 그래서 백전백패다. 사실과 논리로 무장한 남편을 느낌과 의견을 쏟아내는 나는 절대 이길 수 없는 것이다. 남에게 설명도 참 못한다. 머릿속에 생각과 느낌이 뒤섞여 결국 밖으로 나오는 말은 나의 생각의 작은 파편 중의 하나이고 이것은 내가 말하려던 바를 10%도 표현하지 못한다.
그래서 나는 글을 쓰나 보다. 분명 내 머릿속 어딘가에 존재하는 기억을 나만의 방식으로 풀어내기 위해. 나도 기억하고 있고, 그 기억을 차분하게 설명할 수 있고, 하나의 완결된 글로써 내보일 수 있다고 증명하기 위해.
김영하나 하루키 같이, 아니 굳이 이런 유명 작가가 아니더라도 페북을 켜면 쉽게 만나 볼 수 있는 글 잘 쓰는 사람들을 보면 그렇게 멋질 수가 없다. 똑같이 24시간을 살고, 비슷한 경험을 하며 살고 있는데 어쩜 이 사람들은 이런 사소한 주제로 이렇게까지 디테일하게 생각하고 표현할 수 있는 걸까. 브런치를 열고 차분히 한 문장 한 문장 적어 내려가 하나의 글을 완성하면 나도 그들과 아주 조금 비슷해진 것 같아 뿌듯해지기도 한다.
너무나 와 닿는, 좋은, 무릎을 탁 치게 만드는 문장들로 이루어진 책을 발견하면 참 행복하다. 이런 읽는 행복감이 발전해서 '나도 한번...?' 써보고 싶은 마음을 만드는 것 같기도 하다.
몇 년 전부터는 마음속 한구석에 '나도 소설을 써볼 수 있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자그마하게 품고 있다. 그래서 짬이 날 때 머릿속에 스토리를 구상해 본다. 대부분이 내가 일상에서 마주하는 현실의 연장선 상에 있는 스토리들이다. 부끄럽지만 브런치 작가의 서랍에도 아기 키우며 인스타 하는 엄마에 대한 이야기 1장 정도가 쓰여있다. 소설은 여주인공이 남편과 싸우고 아주 화난 상태에서 시작한다 (그렇다. 남편과 싸우고 열 받아서 쓰기 시작했다). 소설을 이렇게 쓰는 건지는 잘 모르겠지만 그 글을 쓰면서 정말 재밌었다. 내 속에 있는 이야기를 구구절절 남의 얘기처럼 풀어놓고 나니, 남편에 대한 화도 조금은 누그러졌다. 그리고 지금 읽어봐도 재미있다 ㅋㅋ
나는 여러 가지 이유로 글을 쓰고 앞으로도 쓸 예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