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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uliettee Nov 21. 2019

라디오 예찬

오징어 열세 다리

시작은 오징어 열세 다리였다. 


아이 등하원으로 오전 9-10시, 오후 3시 반-4시 반, 거진 두 시간을 매일 차 안에서 보내고 있다. 아이가 차에 같이 있을 때는 동요를 틀어주던지, '오늘 재밌게 놀았어?' 등의 말을 걸고 있으니 차 안에 내가 혼자 있는 시간은 한 시간 남짓이다. 차에 타면 으레 습관처럼 라디오를 틀어놓았지만 내 신경은 언제나 손에 들려있는 핸드폰에 쏠려 있었다. 단톡방에서 무슨 대화를 하고 있는지, 인스타에 누가 새로운 사진을 올렸는지, 페북에 어떤 기사가 올라왔는지 틈틈이 읽으며 위험한 운전을 했다. 


운전 등하원 초반에는 그 사이 영어 공부라도 하겠다며 fm 101.3 영어방송을 들었는데, 이 주파수가 이상하게도 판교에서 분당 끄트머리로 넘어오면서 서서히 잡음이 생기는데, 그 '지지직' 거리는 소음이 듣기 싫어 곧 그만두었다. 다른 방송들도 마찬가지였다. 어색한 억양의 오버스러운 라디오 진행자들, 유치하고 시끄러운 CM송이 나오는 광고들은 공해로만 느껴져 좋은 노래가 나올 때나 듣고 있지, 사람 목소리가 나오면 이내 다른 주파수로 돌려버리기 일쑤였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슬슬 바람이 차가워지기 시작하는 가을날의 오후. 왼쪽에는 햇살에 반짝이는 정자동 주상복합 건물들을, 오른쪽에는 색색이 물들어 가는 가로수길을 양쪽에 두고 분당내곡간 도로를 달리고 있는데 무심코 틀어놓은 라디오에서 이 노래가 흘러나왔다. 


'오징어 열세 다리~ (그녀는 두 다리~) 오징어 세모 머리~ (그녀는 계란 머리~) 오징어 이상했죠~' 


익숙한 멜로디와 리듬 그리고 여전히 알아듣기 힘든 가사가 흘러나오는데, 가슴에 구름이 몽글몽글 솟아나는 것 같은 즐거움이 피어올랐다. 어릴 적 TV 음악 프로그램에서 봤던 것 같은, 5명의 남자 아이돌이 오징어 탈을 뒤집어쓰고 손발을 휘저으며 춤을 추는 장면이 떠올라 나도 어깨와 한 손을 휘저으며 춤을 췄다. 기분이 더 더 좋아졌다. 애 데리러 가는 길에 차 안에서 오징어 춤을 추는 엄마라니. 내 모습이 우스워 계속 웃음이 났다. 그리고는 어떻게 하다 이런 노래가 흘러나오게 되었나 노래가 끝난 후에도 가만히 귀를 기울였다.



라디오 안에는 세상과 사람들이 있었다. 


광고 없이 내가 좋아하는 노래를 들을 수 있는 멜론이 있어도, 몰입감 최고인 드라마가 쌓여있는 넷플릭스가 있어도 사람 사는 얘기, 세상 돌아가는 얘기를 들을 수 있는 곳은 라디오뿐이었다. 이걸 깨닫고 나서 집에서도 차 안에서도 라디오를 탐색하기 시작했다. 일정한 시간대에 다른 주파수의 방송을 돌려 듣다 보니 내 취향에 맞는 방송들을 찾을 수 있었다. 너무 감성적인, 신파적인 이야기가 많이 나오는 방송은 내 스타일이 아니었다. 너무 젊은 진행자가 트렌디한 음악을 틀어주는 방송도 마음이 가지 않았다. 하루 종일 같은 스타일의 노래와 이야기를 듣는 것도 지루할 것 같았다. 그리고 얼마 전 이런저런 조합을 맞춰 나만의 라디오 리스트를 완성했다. 


아침에 일어나서는 김승휘 아나운서의 잔잔한 목소리와 클래식 음악을 들으며 하루를 준비한다 (요미님 덕에 알게 된 방송. 고마워요!). 클래식을 들려주며 아이를 깨우면 정서에 좋을 것 같은 느낌적인 느낌을 담아. 아이를 원에 올려 보낸 후에는 이숙영의 러브 fm 끝부분을 듣는다. 며칠 전 아이 등원 후 길에 차들이 왜 이렇게 없지...라고 생각하며 집에 돌아오는데 라디오 사연을 통해 그 날이 수능날임을 알게 되었다. 집에 돌아와서는 이재익 PD의 정치쇼를 들으며 집안일을 시작한다. 남편이 시사 모른다고 타박하여 '네가 듣는 거 나도 들어서 아는 체해야지' 라며 듣기 시작했는데 의외로 재밌어서 계속 듣게 된다. 하원 길에는 나의 최애 방송! 나르샤의 '아브다카다브라'를 듣는다. 난 브라운 아이드 걸스를 그다지 좋아하지도 않았고, 그중 나르샤는 관심 조차 없던 멤버였는데 듣다 보니 사람에게도 방송에게도 애정이 생긴다. 나를 라디오의 세계로 빠져들게 한 오징어 외계인을 틀어준 곳도 바로 이 방송.  


어제는 라디오에서 어떤 사람이 낙엽이 떨어지는 걸 보니 마음이 쓸쓸하다는 사연을 보냈다. 나도 점점 스산해지는 공기를 느끼며 마음이 한편이 아릿해지는 요즘이었다. 오늘은 캐럴 한 곡이 나왔는데 한 달 앞으로 다가온 크리스마스가 생각나며 괜히 설레었다. 아니나 다를까 캐럴만 들어도 설렌다는 애청자 문자가 쇄도했다. 수능날에는 아이를 시험장에 들여보낸 엄마들의 간절한 기도를 들으며 우리 엄마도 나 수능 보는 날 그랬겠구나... 를 생각했고, 우리 아이가 수능을 보면 나는 뭘 하고 있어야 하나... 라며 15년도 더 있어야 올 날을 상상해 보기도 했다.  




'많이 경험하고 느끼고 생각하며 인생을 풍부하게 살아 내는 것'. 아직 인생의 반도 살지 않았지만 내가 지금까지 생각해 온 잘 사는 삶이란 이런 삶이다. 그런 의미에서 내 기억 속 먼지 한 톨 만하게 남아있던 오징어 열세 다리를 끌어내어 나를 춤추게 하고 웃게 하는 이 라디오는 잘 사는 삶에 필수 요소 일 수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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