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요일 오후 4시 43분. 한 달이 넘는 긴 장마 끝에 찾아온 폭염이 거리를 달구고 있었다. 당장에라도 운동복을 갖춰 입고 나가 눈여겨보았던 코스를 달려볼까 하다가도, 오전에 공원에서 킥보드 타는 아들을 쫓아다니며 흘린 땀을 생각하며 그 길을 째려보고만 있는 것이다.
하 아무래도 오후는 무리지. 낮잠 든 아이가 언제 깰지도 모르고, 지금 섣불리 달렸다간 저녁에 아이 볼 때 정말 힘들지도 몰라. 달리기는 내일 오전으로 미루자.
아닌 게 아니라 나는 다시 달리기로 마음먹은 지 한 달 반이 된 것이다. 복직하면서부터 이제는 좀 규칙적으로 살아봐야지, 체력이 달려서 안 되겠군 싶어 마음을 먹었는데 하필 몇십 년 만의 긴긴 장마가 찾아온 것이다 (찾아보니 54일이라고 한다). 아파트 커뮤니티 센터도 아직 새 아파트라 오픈을 하지 않았고, 오픈을 했더라도 코로나 때문에 문을 열고 있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이 장마가 끝나기만을 마음속에 칼을 갈며 기다리고 있었고, 그 의지의 불꽃을 계속 피우기 위해 이번 달 독서 모임 책도 하루키의 달리기 책으로 정해 놓은 것이다.
하루키의 달리기 책은 내가 손에 꼽는 좋아하는 책이고, 달리기는 나의 20대를 추억하는 아주 중요한 매개물이다. 어떻게 시작했는지는 잘 기억이 나지 않지만 나는 20대 중반 어느 날부터 달리기 시작했다. 회사일 스트레스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다이어트를 위한 운동 목적이었을까. 어찌 되었든 난 달리기 시작했고 새벽 대여섯 시에 일어나 한 시간 달리고 출근하는 루틴은 꽤 오랫동안 이어져 왔다. 풀 마라톤은 달려보지 못했지만 10킬로 마라톤은 재미 삼아 몇 번 나가봤고 힘들이지 않고 달릴 수 있었다. 달리기에는 루틴이 있었는데, 일단 집에서 동네 꽤 큰 고등학교까지 슬슬 달리며 몸을 풀어준다. 그리고 운동장에 도착하면 겉옷을 스탠드에 벗어 놓고 아이팟 미니를 손에 쥔다. 달릴 때마다 듣는 플레이 리스트를 켜고 아직은 어두컴컴한 트랙 위를 한발 한 발 내딛는다. 차가운 공기와 새벽녘의 적막함은 마음을 차분하게 해 주고 왠지 경건한 마음까지 들게 해 준다. 마음속으로 정한 횟수를 채우고 나서 볼이 터질 것 같이 빨개질 때쯤이 되면 이제 마지막 반 바퀴. 그 마지막 반 바퀴는 온몸의 힘을 쥐어짜 내 전속력으로 달리는 것이다. ‘거봐 아직 힘이 남아있잖아. 내일은 오늘보다 더 달릴 수 있어’ 내 몸에게 말해주는 것이다.
달리기 취미는 내가 자전거에 재미를 들이면서 점점 사그라들었다. 내 몸의 동력을 이용하는 건 마찬가지이지만 달리기보다 훨씬 빨리, 멀리 갈 수 있는 자전거가 더 재미있어 졌다. 그 이후 결혼을 하고 새로운 동네에서 몇 번 달리기를 다시 시도해 보았지만 단발성 시도에 끝나고 말았다. 무엇보다 이 동네는 달릴 곳이 별로 없었다. 하지만 이사를 오면서 작은 천 옆으로 난 산책길을 보고는 마음속에 다시 불씨가 생겨났다.
그 불씨를 간직한 채 오늘도 하루키 달리기 책을 읽으며 개천 길을 째려본다. 이 길에 부디 정을 붙일 수 있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