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장준우 Dec 07. 2016

맛은 꼭 접시 위에 있지만은 않아

카메라와 부엌칼을 든 남자의 유럽 음식 방랑기


여행을 할 때 가장 반갑지 않은 건 비다. 매일 화창기만 하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으련만 속도 모르고 내리는 비는 그러잖아도 육중한 몸과 마음을 더 무겁게 한다. 허나 비가 꼭 나쁜 것만은 아니다. 왜 그런 말도 있지 않은가. '맑은 날이 계속되면 사막이 된다.’ 평소 게으른 사람일지라도 여행만 하면 무언가 부지런히 움직여야 한다는 강박을 무의식적으로 가지게 마련이다. 이럴 때 잠깐의 휴식과 안정을 선사해 주는 존재가 바로 예기치 않은 비다. 발걸음은 멈추지만 생각은 좀 더 나아가게 된다. 


포르투갈 리스본에서의 둘째 날도 첫날과 마찬가지로 폭우가 쏟아졌다. 느지막이 점심을 먹기 위해 찾은 곳은 'Solar 31 da Calçada'란 이름의 식당. 철저하게 여행 준비를 하는 부지런한 타입이 아닌지라 낯선 곳에서 한 끼를 먹을 곳을 정하는 건 대부분 즉흥적으로 결정하는 편이다. 우선 식당의 파사드(Façade), 그러니까 전면에서 전해지는 아우라(Aura)가 첫째요, 인테리어와 조명, 테이블 배치의 하모니(Harmony), 그다음엔 종업원의 표정, 주방의 위생상태, 전통 메뉴와 창작메뉴의 다양성 등을 종합적으로 면밀히 분석해 식당을 정하고 그러진 않는다. 배고픈데 언제 그런 걸 다 따지고 있는가. 대개 식당의 분위기와 가격만 대충 훑어보고 들어가 메뉴를 고르고 나면 주방을 관장하는 조왕신(竈王神)에게 기도를 한다. 부디 간 만이라도 제대로 된 요리가 나오기를.



대부분은 이런 식이지만 아무래도 비도 세차게 오는지라 괜한 수고를 덜고자 여행자의 소중한 친구 트립어드바이저의 도움을 받았다. 음... 리스본에 있는 3500여 개의 식당 중 20위라니. 나쁘지 않은 선택이겠군. 이 '여행 조언자'는 온전히 고객의 만족도, 입소문에 의해 평가되는데 제법 믿을만하다. 집단지성의 힘이랄까. 거센 폭우를 뚫고 겨우 식당을 찾았다. 자리에 앉으니 잠시 후 덩치 좋고 인상 좋은 종업원이 메뉴판을 갖다 준다. 그러면서 어디서 왔냐고 묻는다. 조건반사적인 웃음과 함께 "코리아"라고 대답을 하면서도 속으론 '어디라고 하면 당신이 알아? 그리고 그게 왜 중요한 거지? 너희 서양인들의 과잉친절은 이제 지치니 그만 좀 해'란 생각을 했다. 너무 까칠한 게 아니냐는 생각이 든다면 이해해주길 바란다. 방금까지 장대처럼 내리는 비를 거의 다 맞다시피 해 식당을 찾아온 상황임을. 



우리의 덩치 좋고 인상 좋은 포르투갈 아저씨는 이 낯선 동양인이 유라시아 대륙 정반대 편에서 온 여행자라는 걸 알자 '그럼 그렇지' 하는 표정을 짓고는 메뉴 설명을 하기 시작했다. 그의 유창한 영어를 온전히 다 알아들은 건 아니라고 미리 고백하겠다. 그래도 나름 오래전 수능 외국어 영역 듣기 평가에서 하나도 틀리지 않았던 실력을 총동원해보자면 번역된 그의 설명은 대략 이러했다. 


'우리 메뉴는 이런이런 메뉴가 있는데 한국인 손님들은 이런저런 메뉴를 선호하는 편이더군. 다른 한국인들은 저런 그런 메뉴를 선택하기도 하지만 이런저런 메뉴에 상당히 만족해했네. 어디까지나 메뉴를 선택하는 건 당신의 선택이고 어떤 메뉴를 선택하더라도 실망하지 않을 거니 편하게 메뉴를 고르길 바라네'


감동에 눈물이 났다. 사실 문자 그대로만 보면 그렇게 감동할 만한 일은 아니겠지만 나의 기분은 그랬다. 빗속을 뚫고 온 스스로가 대견해 위로받고 싶었던 걸까. 아니면 그의 진심 어린 친절 때문이었을까. 아까의 까칠했던 속마음을 반성하며 메뉴를 선택했다. 그리고 호쾌하게 와인 1리터를 주문했다. 테이블로 온 그가 '워워, 친구'하는 당황스러운 표정을 짓다가 웃으며 이야기했다.  


"물론 당신이 원한다면 와인 1리터를 줄 수 있네. 우리 집 와인이 꽤 맛이 좋긴 하지만 지금은 점심이고 밖에 비도 오고 하니 일단 1/2리터로 시작하는 게 어떻겠나. 나중에 더 필요하면 이야기하게. 우린 준비가 돼 있으니"


사실 그냥 1리터를 줄 수도 있었다. 굳이 더 먹겠다고 하는 손님을 말리는 건 영 낯설었다. 그의 본심이야 어떨지 모르지만 그의 한마디는 적어도 동양의 작은 나라에서 온 고객에게 '우리 집은 매상보다 손님이 중요하다'는 인상을 주기엔 모자람이 없는 배려였다. 음식을 먹기도 전에 이미 훈훈해진 감동으로 마음이 불러왔다. 어디서도 맛보지 못한 훌륭한 전채요리였다. 



우리의 덩치 좋고 인상 좋은 아저씨의 이름은 파울로 Paulo. 식당의 매니저였다. 식사를 마친 후에도 비가 잦아들긴커녕 더욱 거세져 한동안 테이블에 앉아 있어야 했다. 덕분에 여전히 테이블을 넘나들며 손님들과 이야기를 주고받는 파울로를 좀 더 관찰할 수 있었다. 손님이 부담스럽다고 느끼지 않을 만큼 거리를 유지하면서도 편안하면서 따뜻하게, 그러면서 당당하게 고객들에게 다가가는 그를 보고 있자니 서비스의 의미를 다시금 생각하게 됐다. 


단지 직업으로서의 친절함과 관심과 배려에서 비롯되는 친절함은 그 결이 다르다. 전자에서  감동을 느끼긴 어렵다. 서비스직 종사자로서 상냥함을 몸에 두른 종업원이 보여주는 과장된 친절함을 보고 있노라면 어딘가 모르게 불편해진다. 지나친 응대로 괜히 우쭐해지기도 하고 동시에 미안한 마음이 생기기도 한다. 이런 서비스는 받는 이도, 주는 이도 즐겁지 않다. 


후자는 다르다. 서비스를 주는 쪽과 받는 쪽은 동등하다. 서비스를 주는 쪽은 상대방에게 제일 나은 선택이 무엇인지 조언하되 결코 손님 위에서 가르치거나 아래에서 굽실거리지 않는다. 서비스를 받는 쪽은 자신감 있는 상대방의 태도를 보고 신뢰한다. 어느 한쪽이 부담을 느끼다던가, 굴욕감을 느낄 필요도 없다. 여기에 서비스를 주는 쪽에게 고객을 위해 내가 무엇을 할 수 있을까란 생각이 더해지면 진심 어린 서비스가 된다. 관심과 배려 없이는 이런 생각을 할 수 없기 때문이다. 


메뉴를 고르기 전 국적을 물었던 파울로의 질문은 상당히 노련한 수였다. 손님은 다 같지 않다. 나이와 국적, 성별에 따라 취향도 입맛도 모두 다르다. 음식을 만들고 파는 사람은 어떤 한 음식이 모두에게 맛있고 좋을 수는 없다는 걸 알고 있어야 한다. 그래야 '맞춤형 서비스'가 가능해진다. 파울로는 말도 잘 통하지 않은 낯선 손님을 그냥 무시할 수도 있었지만 관심을 갖고 질문을 했다. 선택에 대해 존중하면서 동시에 배려도 잊지 않았다. 와인은 1/2리터로도 충분했다. 만약 1리터를 다 마셨으면 아마 취기로 인해 빗길에 넘어져 험한 꼴을 당했으리라.  


요리 자체는 평범하지만 더할 나위 없이 만족스러웠다. 만약 이 요리를 다른 곳에서 먹었다면 과연 나는 만족스럽게 먹었을까. 평범한 요리를 그토록 만족스럽게 만든 건 파울로의 진심 어린 서비스였다. 


맛은 반드시 주방과 접시 위에서만 만들어지는 것만은 아니다.

연인이 서툴게 만들어주는 음식이나 집밥에 감동하는 건 그것은 온전히 나를 위한 요리이기 때문이다.

나라는 존재가 그저 지갑을 열고 가는 존재가 아님을 깨닫게 해주는 배려와 관심. 그 한 방울이면 세상에 맛없지 않을 요리가 또 어디 있을까.











-'카메라와 부엌칼을 든 남자'는?

기자 생활을 하다 요리에 이끌려 무작정 유학길에 올랐습니다. 이탈리아 요리학교 ICIF를 졸업하고 시칠리아에서 주방에서 요리를 배웠습니다. 요리란 결국 사람, 공간에 대한 이야기라는 걸 깨닫고 유럽 방랑길에 올랐습니다. 방랑 중에 보고 느끼고 배운 음식과 요리, 공간과 사람에 관해 이야기해보고자 합니다. 더 많은 사진과 뒷 이야기들은 페이스북(www.facebook.com/jangjunwoo)에서 보실 수 있습니다.


###‘카메라와 부엌칼을 든 남자의 유럽 방랑’ 후원하고 사진집 받으세요###

자세한 내용은 ☞https://goo.gl/lSO7Xs


매거진의 이전글 눈으로 마시는 술, 스페인 사과주 '시드라(Sidra)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