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메라와 부엌칼을 든 남자의 유럽음식방랑기
스페인 북부지방의 식문화를 이야기할 때 빠지지 않는 것이 있다. 바로 사과를 발효시켜 만든 사과주 시드라(Sidra)다. 사과로 웬 술이냐는 의문이 들 수 있지만, 포도로도 술을 만드는데 사과라고 못할 건 없지 않은가. 이런 생각을 과거 로마인들이 했다.
일설에 따르면 와인을 좋아하기로 둘째 가라면 서러워할 로마인들이 당시 갈리아 서쪽 지역, 그러니까 오늘날 프랑스 노르망디 지역과 그 인근 스페인 바스크 지역을 정복했을 때다. 로마인들은 늘 그래 왔듯 와인을 현지에서 조달하고자 정복지마다 포도나무를 심었다고 한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 지역은 포도를 재배하기엔 기후가 좋지 않았고 대신 원래부터 그 지역에서 남아돌던 사과를 이용해 와인을 만들어 본 것이 사과주의 시초가 됐다고 전해진다.
물론 어디까지나 사과주를 둘러싼 여러 가설과 추측 중 하나다. 로마인 이전 그 땅에 머물던 켈트족이 사과로 술을 만드는 기술을 가지고 있었다는 주장도 있지만 기록은 없다. '사과주'라는 직접적인 언급은 없지만 노르망디 지역과 바스크 지역의 사과에 대한 언급은 간접적으로 있어왔다. 심증은 있는데 물증이 없달까. 시간이 흘러 12세기경에야 비로소 문헌에 사과주의 존재가 처음 등장한다. 그 기록에 따르면 바스크 지방 해안 출신의 선원들이 지중해 항로를 따라 이 '발효된 사과 주스'를 수출했다고 하며, 비슷한 시기 바스크 지역의 나바라 왕국이 포고한 한 문서에도 사과주의 흔적을 찾아볼 수 있다. 중세시대엔 과수원과 양조장을 소유한 수도원이 와인과 사과주, 맥주 등을 생산했는데 사과주는 와인과 함께 귀족의 술, 맥주는 서민의 술로 통했다고 하니 역사가 꽤 오랜 술임엔 분명하다.
오늘날 사과주를 대표하는 곳은 프랑스와 영국이다. '시드르 Cidre'로 부르는 프랑스의 사과주는 프랑스 내에서 와인 다음으로 많이 소비되는 대중적인 주류다. 사과즙에 레몬이나 베리류 등 다른 과일이나 기타 첨가물을 넣어 다양한 맛과 향을 내는 시드르가 생산되는데 고품질의 시드르는 주로 고급 레스토랑에서 식전주로 이용된다. 특히 이 시드르를 증류해서 만든 '칼바도스'가 유명한데 와인을 증류한 코냑과 함께 프랑스를 대표하는 증류주로 통한다.
영국은 세계에서 사과주(Cider) 1인당 소비가 가장 많은 국가다. 독일에서는 프랑크푸르트산 아펠바인(Apfelwein:사과와인)이 대표적이며 포르투갈, 캐나다, 호주, 그리고 덴마크를 중심으로 한 북유럽 등지에서도 다양한 방식으로 사과주를 제조 판매하고 있다.
이탈리아에서는 좀 독특한 형태의 사과주가 존재한다. 사과주를 와인을 담던 통에 숙성시켜 사과주 특유의 향과 맛을 지니면서도 포도의 향과 색깔도 함께 담긴 '시드로 Sirdo'는 이탈리아에서 독특한 와인으로 대접받는다. (참고로 와인통에 맥주를 넣고 숙성시킨 것도 있다. Rodenbach의 'Grand Cru'가 대표적)
다시 스페인으로 돌아와 보자. 옆 나라 프랑스나 영국에 비해 스페인 주류시장에 있어 사과주는 그 비중이 크진 않다. 스페인의 사과주, '시드라' 하면 단연 바스크와 아스투리아스 지방을 꼽는데 그도 그럴 것이 스페인 내에서 품질 좋은 사과가 많이 생산되는 곳이기도 하며 아직까지 전통방식으로 사과주를 만들어 내기 때문이다. 정제를 하지 않아 뿌연 색깔이 특징이며 '사과주의 원형'에 가깝다고 평가받는다.
수작업으로 사과주를 만드는 방식은 와인을 만드는 방법과 유사하다. 수확한 사과를 절구통에 넣고 절구 방망이로 찧은 다음 나무틀에 넣고 즙을 짜낸다. 즙을 나무통에 넣은 다음 5~6개월 정도 발효시키면 사과주가 완성된다. 여기서 설탕을 더 첨가해 당도와 탄산함유량을 높이기도 하지만 일반적으로 Sidra natural라고 하면 설탕을 첨가하지 않은 순수한 100% 사과즙으로만 만든 것을 의미한다. 이렇게 만든 시드라의 알코올 도수는 4~6도 내외다. 포도보다 당분 함량이 적어 알코올로 변환되는 정도가 크지 않다. 이 때문에 생각보다 그리 달지 않으며 사과 특유의 산미와 더불어 신 막걸리에서 나는 쿰쿰한 발효 냄새와 비슷한 향을 내는 것이 특징이다.
시드라를 마시는 방법은 꽤 독특하다. 곡예를 하듯 따르는 것이 정석인데 이게 참 재미있다. 병을 든 손을 머리 위로 쭉 뻗고 잔을 든 다른 한 손은 아래로 쭉 뻗는다. 그 상태 그대로 병만 기울여 잔에 시드라를 따라낸다. 참 진기한 장면이다. 그러면서 의문이 든다. 왜 이렇게 꼭 따라야 할까. 일종의 디캔딩 과정이다. 산도가 강한 시드라를 공기 중에 최대한 노출해 신 맛을 어느 정도 중화시키면서도 탄산 기도 다소 누그러뜨려 주는 나름 과학적인 방법인 것이다.
바스크나 아스투리아스 지방의 펍이나 레스토랑을 보면 'Sidreria'라는 이름이 붙은 걸 볼 수 있는데 시드라를 파는 곳이란 뜻이기도 하지만 시드라를 따라주는 숙련된 직원들이 있다는 의미도 있다. 1미터가량 되는 높이에서 시드라를 바닥에 흘리지 않고 따르는 것은 꽤 숙련을 필요하는 작업이다. 능숙하게 시드라를 따르는 이들이 있는 반면 매상을 올리려 일부러 바닥에 과도하게 흘리는 게 아닐까 하는 의심을 하게 할 만큼 엉망으로 따라주는 서버도 심심찮게 볼 수 있다. 스페인 시드라는 어쩌면 그 맛보다 시드라 따라주는 광경이 지금과 같은 명성을 얻는데 큰 역할을 한 게 아닐까 싶다.
모든 사과주를 이렇게 따라먹어야 하는 건 아니다. 스페인, 그것도 이 지역의 시드라만 해당된다. 정제된 투명한 시드라를 이렇게 먹으면 오히려 맛이 반감된다. 화이트 와인보다 산미가 강한 것이 특징이지만 와인보다는 부담이 덜한 알코올 도수와 가격, 탄산이 부담스러운 맥주와 비교할 때 사과주는 충분히 경쟁력이 있다.
풋사과가 주는 산뜻한 산미와 발효된 과일 특유의 독특한 향미가 식욕을 북돋아주는 식전주 역할뿐 아니라 육류 생선류를 가리지 않고 메인 요리에도 어울리며 소화를 돕는 식후주의 역할까지 무리 없이 해낸다. 노르딕 퀴진을 표방하는 몇몇 레스토랑에서 페어링에 사과주를 포함시키는 것도 나름 이유가 있어 보인다.
-'카메라와 부엌칼을 든 남자'는?
기자 생활을 하다 요리에 이끌려 무작정 유학길에 올랐습니다. 이탈리아 요리학교 ICIF를 졸업하고 시칠리아에서 주방에서 요리를 배웠습니다. 요리란 결국 사람, 공간에 대한 이야기라는 걸 깨닫고 유럽 방랑길에 올랐습니다. 방랑 중에 보고 느끼고 배운 음식과 요리, 공간과 사람에 관해 이야기해보고자 합니다. 더 많은 사진과 뒷 이야기들은 페이스북(www.facebook.com/jangjunwoo)에서 보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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