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립다는 것은 좋았었다는 것

by 인아

마음이 가장 오래 머무는 장소를 생각했을 때 떠오르는 장소가 없었다. 아주 오랫동안 다니는 단골 카페도 없었고, 주기적으로 가는 여행 지도 없다. 자주 이사 다니는 편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한 동네에서 몇십 년을 살지도 않았다. 물리적이 아니더라도 내 마음이 가장 오래 머무는 장소는 어디일까 생각해 봤는데 역시 쉽게 떠오르지 않았다. 아! 나란 사람이 이렇게 취향도 없는 재미없는 사람이었던가 하는 이유 없는 자괴감마저 들었다. 내 마음은 순간순간 어디를 떠돌고 있을까?

지금 너는 어디를 향하고 있니?

얼마 전 지인과 얘기를 나누다가 딱 돈 만 원만 들고 7-8세 때쯤으로 돌아가고 싶다는 말을 했다. 내가 좋아했던 설탕 뽑기, 컵 떡볶이와 떡꼬치, 50원짜리 깐돌이 아이스크림, 100원으로 즐길 수 있던 방방과 플라스틱 목마, 100원짜리 뽑기와 아폴로 같은 불량 식품들. 딱 그 만 원으로 반나절만 부자처럼 플렉스~하고 오고 싶다고 웃으면서 얘기하니 지인이 말했다. 이제 어린 시절의 아픔이 많이 치유됐나 보다고. 그런 건 아니라고, 오히려 그때 즈음이 내 유년 시절에서는 어쩌면 제일 행복했을 때 일지도 모른다고 대답해 주었다. 그래도 아직은 덜 상처받고 아직은 순수했으며 아직은 외롭지 않았으니까.

아주 가끔씩, 아니면 아주 종종 내 몸이 둥실 떠올라 내가 10살까지 살았던 그 집으로 여행을 떠난다. 집 밖에는 개천이 있고, 개천 위에는 지하철 선로가 지나가고 있다. 시멘트로 덮인 마당에는 아빠가 벽돌로 만든 개집이 있고 담벼락 밑에는 작은 꽃밭이 있다. 그 담벼락 밖에는 가을이면 노란 잎을 뿜어내던 은행나무도 있었다. 아래 연탄을 쌓아두던 지하실이 있던 거실, 그리고 다락방이 있던 방들. 거실로 연결되는 현관문까지. 내 몸은 작아지고 가벼워져서 지금은 없어진 그 집을 부유한다.

언젠가 아주 오랜만에, 거의 20년 만에 살던 동네에 가본 적이 있었다. 생각보다 많이 바뀌어서 당황했지만 아직도 그 집에 남아있었다. 대문은 바뀌고 담벼락도 헐려 있었지만 아직까지 노란 잎을 매달고 있던 은행나무와 작은방의 창틀이 그대로였다. 너무 반갑고 애틋했다. 아직까지 남아 있어서 기뻤다. 집 안의 방들과 마루는 어떤 모습일까 궁금했었다. 그 후로 3년 즈음 지나 한 번 더 가봤는데 집이 헐려 있었다. 그 은행나무도 잘려버렸다. 내 마음 한구석이 잘린 것처럼 아팠었다. 이제 사진과 내 기억 속에서만 내 유년 시절의 집을 볼 수 있겠구나, 존재하지 않은 무언가를, 지나간 시간을 그리워하는 건 메마른 서글픔을 느끼는 일이었다.

상계동에 있던 적갈색 대문의 우리 집은 객관적으로 살기 편한 곳은 아니었다. 부엌을 가려면 문을 나와 한 계단 내려가야 됐으며, 수세식도 아닌 재래식 화장실은 마당 한구석에 있었다. 심지어 우리 집에 세 들어 살던 사람들과 공유해야 했다. 보일러도 아닌 연탄을 때는 난방시설이었으며, 마루 아래에는 지하실이 있었기 때문에 겨울에는 불도 들어오지 않고 마룻바닥을 밟을 때마다 얼음을 밟는 것처럼 발바닥이 얼어붙는 것 같았다. 동네에 개천이 있고 마당이 있는 집이라 쥐도 있던 집이었다. 그렇지만 그 집을, 그 장소를 생각할 때마다 내 마음 한구석이 웃고 있다. 웃음이 점점 스며 나와 내 얼굴 위로 번지고 있다. 그래서 깨달았다. 지난 유년 시절이 슬프고 괴롭기만 한 건 아니었다고. 나에게도 웃으면서 얘기할 수 있는 유년 시절이 한 조각이 존재하는구나 하고….

그 집에서 10살 9월까지 살았다. 토요일 마지막으로 학교에 가서 친구들에게 인사를 하고 일요일에 이사를 했다. 아마도 이사하기 일주일 전쯤 현관문을 열어둔 체 현관문 앞 계단에 앉아서 마당과 집안을 동시에 들여다봤던 일이 생각난다. 꽃밭의 포도나무, 장독대 위의 항아리, 마당에 있는 수도꼭지, 아빠가 직접 만든 개집, 낡은 대문과 현관문, 현관문을 열면 보이는 바로 보이는 책장까지 손으로 쓰다듬으며 안녕! 잘 있어하고 인사를 했다. 인사하면서 눈물도 흘렸던 것 같다. 그때는 몰랐지만 내 작은 유년 시절에 작별을 고하는 의식 같았다.

가끔 형체도 없는 무언가가 그립고 애틋하고 그러다 못해 마음이 서글퍼질 때가 있다. 나는 무엇을 그렇게 애타게 그리워하는 것일까? 그럴 때마다 내 마음은 상계동에 있는 적갈색 대문 집의 마당에 앉아있다. 내 안에 꽁꽁 숨어있는 작은 여자아이가 그 마당 안을 뛰어다니며 웃고 있다. 아직은 슬픔이 뭔지 모른다는 표정으로 웃고 있는 그 아이가 나는 왠지 슬프다.

토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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