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세라서 행복해요

by 양경은

민원 124 사이트에서 주민등록등본을 출력한다. 이력 포함을 할 것인지 말 것인지 선택을 해야 한다. 이력을 포함하지 않고 최근 주소만 나오도록 신청한다.

어릴 적 주민등록등본을 제출하라고 하면 나는 2장짜리였다. 내가 어릴 적에 직접 동사무소에 가서 신청한 적은 없다. 엄마가 뽑아다가 줬다. 신청하는 시스템이 어떻게 되는 건지 몰랐다. 다만 나는 2장짜리 주민등록등본이 싫었다. 이사를 자주 가다 보니 지나온 시절에 많은 집주소가 나열되어 있다.

이사 다닌 이력이 나에게 하등의 도움이 되질 않는다. 소위 말하는 스펙에 넣을 수도 없는 이사 이력이 무슨 필요가 있겠는가? 셋방살이를 했던 어린 시절에 늘 꿈 꿔 온 것은 내 집에 사는 삶이었다. 주인이 이사 가라고 말해서 가는 이사가 아닌 내가 원해서 이사를 가는 삶을 원했다. 나는 내 집에 대한 간절함이 있었다.





4년 열애 끝에 결혼을 했다. 남편이나 나나 양가 부모님이 넉넉지 않았다. 서로가 직장생활 동안 모은 돈으로 결혼 준비를 했다. 결혼 준비랄 것도 없었다. 나는 집이 가장 중요했다. 수원 영통에 4천7백만 원짜리 21평 전셋집을 얻었다. 둘이 합쳐서 모아보니 전셋집은 마련할 수 있었다. 집안 살림살이는 새로 구입하지도 않았다. 그릇, 가구는 대부분 남편과 내가 자취생활 동안 사용한 것들로 시작했다. 침대와 안방 옷장, 5단 서랍장만 스크래치 가구 할인매장에 가서 마련했다. 친정엄마가 침대 이불과 커버 세트를 사주셨다. 딸내미 결혼이라고 처음으로 언니와 함께 백화점에 가서 고급진 이불 세트로 사주셨다. 나중에 친언니한테 들었는데 백화점에 가셔서도 가격 네고를 엄청 시도하려고 하셨단다. 막내딸에게 더 넉넉한 것을 해줄 형편도 되질 않으셨는데 이만큼 해주신 것도 감사했다. 나에게 깨끗한 집이 있다는 사실이 가장 중요했다. 그것도 아파트에 처음 살아보게 된 거다.


깨끗하고 새하얀 벽지가 발라져 있고 주인집과 같은 대문을 쓸 필요가 없는 그런 집에 살게 된 거다. 현관문을 닫으면 다른 사람들은 내 집 , 내 공간에 맘대로 들어올 수 없는 거다. 그렇게 출발한 신혼생활은 꿈만 같았다. 남편은 결혼 후 2년 후부터 직장을 그만두고 사업을 시작했다. 운이 좋았는지 금액이 꽤나 큰 프로젝트가 성공했다. 목돈을 만지게 되었다. 남편은 시어미님 집을 마련해드리자고 제안했다. 시댁 근처에 아파트를 분양했는데 그걸 사드리고 싶다고 했다. 지방이라 훨씬 집값이 저렴했지만 추가 대출을 받아야 살 수 있는 형편이었다. 솔직히 내 집을 먼저 사고 싶었다. 2000년대 초반에는 집값의 거품이 많지 않은 시기였다. 대출을 받는다면 우리 집을 먼저 살 수 있었다.


그러나 반대할 수 없었다. 어머님 집을 사드리고 싶다는 것은 남편이 고민 끝에 나한테 물어본 거다. 이미 그건 상의라는 차원이 아니다. 남편의 바람을 표현한 거다. 시댁 집이 워낙 좁아서 갈 때마다 불편하기도 했다. 그렇게 시어머님 집을 먼저 사드렸다.

그때까지만 해도 나는 언젠가는 내 집을 살 수 있을 거라는 희망이 있었다.




집값은 계속해서 올라갔다. 집의 가치가 올라가는 것도 아닌데 우리 경제사정으로 감당키 어려운 수준까지 계속 올라갔다. 남편의 사업이 조금씩 나아지면서 분당에 입성했다. 물론 전세였다. 이번에는 27평으로 이사했다. '와 점차 집이 커지고 있네' 라면서 좋아했다. 둘 다 대출까지 받아서 집을 살 엄두는 내지 않았다.

둘째를 낳고 나는 직장을 그만두었다. 이때부터 남편의 사업은 기울었다. 아무러 성과도 없이 시간만 흘러갔다. 3년 동안이나. 내 퇴직금과 적금을 빼서 생활비를 충당했다. 그다지 궁핍하게 산 세월은 아니었다. 곧 나아지겠지 라는 막연한 희망에 살았다. 살던 집에서 계약이 만료되어 이사가기를 원했다. 막막했다. 남편 사업은 어렵고 내 통장에 돈은 얼마나 버틸 수 있을지 몰랐다. 5백만 원 정도 전세금에 보탤 수 있었다. 집을 보러 다니는데 지저분했지만 형편에 맞추어 결정을 했다. 이사할 당시 남편의 심정을 가끔 상상해본다. 아마 많이 괴로웠을 거다. 아이들이 한 명에서 두 명으로 늘었기 때문에 깨끗하고 더 좋은 집으로 가고 싶었을 텐데 형편상 갈 수 없었다.


집 없는 서러움의 감정이 조금씩 다시 생겨나기 시작했다. 이후에도 여러 번의 이사를 다녔다. 남편에게 대출을 받아서 집을 구하자고 몇 번씩 이야기를 했다. 그러다 미동도 하지 않았다. 직장을 다니지 않고 사업을 하기 때문에 대출금에 대해 부담이 크다고 했다. 경제적 문제로 싸우고 싶지 않았다. 그냥 참았다. 남들이 하는 아파트 분양신청도 해본 적이 없다. 늘 집 문제로 남편에게 야속했다. 더 이상 강하게 말하지도 않았다. 주위에서는 어떻게든 자기 집들을 마련했다. 물론 현금다발을 들고 집을 사는 사람을 본 적은 없다. 집의 방 두 개 정도는 은행 소유로 되어있었을 거다.



아직도 나는 전셋집에 살고 있다. 언제부터인가 집을 사는 문제는 생각지 않게 되었다. 먼저 남편을 설득하는 것에 포기한 것이 솔직한 심정이다. 욕심이란 것도 능력이 있어야 부릴 수 있는 걸까? 아내가 강하게 주장해서 재테크에 성공하는 사람도 많이 봤다. 나는 재테크에 재주도 없고 관심도 없는 사람이다. 그러니 남편을 강하게 설득해본 적도 없다. 둘 다 아직도 은행 저축만 바라보고 사는 바보다.


이후에는 내가 마음을 고쳐먹었다. 돌이켜보면 이제까지 집의 규모나 위치가 점차 좋은 방향으로 구할 수 있었다. 내 집은 아니지만 네 식구 사는데 별다른 불편함 없는 집으로 이사를 다녔다. 집 문제로 대출을 받아본 적도 없다. 대출금 이자나 원금 걱정은 해본 적이 없다. 늘 형편에 맞추어 집을 구할 수 있었다. 5백만 원밖에 없어서 쩔쩔매고 집을 구한 적도 있지만 전세폭등이 되었을 때 다행히 남편 사업장이 잘되어 전세금을 감당을 해낼 수 있었다. 결혼 20년이 넘으면서 이번이 5번째 집이다. 앞으로 내 집 마련은 점점 소원하게 느껴진다. 천정부지로 솟는 집값은 가히 누군가의 장난질에 놀아나는 것이 아니면 불가능한 현상이다.



늘 형편에 맞추어 전셋집을 이사할 수 있었던 게 신기할 따름이다. 어느 순간부터 신께서 진짜로 나를 도우고 계신다고 느껴졌다. 든든한 백이 나에게도 있다고 확신을 갖기 시작했다. 무엇보다도 남편에 대한 믿음이 굳건해지고 있었다. 이사 다니는 게 불편하고 이사비와 중개수수료가 아깝긴 하다. 그러나 집이란 게 4-5년 정도 살면 지겹게 느껴져서 옮기고 싶은 맘도 든다. 누군가는 어쩌면 집도 없이 전세로 사는 사람의 변명처럼 들릴지 모른다. 세상 물정 모르고 순진하다고 나에게 누군가 말하기도 했다. 그러나 난 행복하다. 지금 살고 있는 집은 내 생전에 꿈꿔보진 못한 멋진 집이다. 누구의 도움도 받아보질 않고 남편과 내가 처음부터 모은 돈으로 마련한 전. 셋. 집이다.


남편과 나는 서로 믿고 따르고 인정하며 살았다. 서로가 추구하는 인생의 방향성을 존중했기 때문에 지금의 행복이 가능한 거다. 내가 세상 물정 모르는 순진한 사람일 수도 있다. 다만 난 가족의 행복을 위해서 적어도 뭘 포기해야 하는지 알고 있다. 어찌 알겠는가? 사업에 대박이 나서 현금다발로 집을 한채 마련할 수 있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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