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프로이트 <애도와 멜랑콜리>의 렌즈로 영화 읽기
1. 말이 되지 못한 감정, 세 개의 광고판
마틴 맥도나 감독의 《쓰리 빌보드, Three Billboards Outside Ebbing, Missouri》는 정의를 외치는 영화처럼 시작하지만, 끝까지 보고 나면 이 영화가 다루는 것은 범죄가 아니라 '감정의 행방'임을 알게 된다. 딸 안젤라가 강간당하고 살해된 지 7개월. 밀드레드 헤이스는 마을 외곽에 세 개의 광고판을 세운다.
“강간당해 죽었는데도 아직 범인이 없다고?”
이 문장은 경찰을 향한 항의처럼 보이지만, 실은 말로 다 삼키지 못한 감정이 세상 밖으로 밀려나온 흔적에 가깝다. 광고판은 설득이 아니라 노출이며, 해결이 아니라 응시다. 애도되지 못한 마음이 더 이상 내부에 머물 수 없어 바깥에 세운 구조물이다.
2. 마지막 말다툼: 분노가 생겨난 자리
이 분노는 사건 이후에 갑자기 생겨난 것이 아니다. 영화 중반 삽입되는, 딸과의 마지막 말다툼 장면은 그 기원을 드러낸다. 차를 쓰지 못하게 된 딸이 걸어서 나가겠다고 하자, “그러다 강간당할 수도 있다”는 말이 오간다. 그 순간 밀드레드는 내뱉는다.
“그럼 강간이나 당해라.”
이 말은 보호가 아니라 저주였고, 사랑이 아니라 통제되지 못한 분노의 언어였다. 이 한마디는 딸의 죽음 이후 밀드레드의 모든 행동을 잠식하는 기억이 된다. 사건보다 먼저 존재했던 감정, 그리고 되돌릴 수 없다는 사실이 그녀를 분노에 묶어 둔다.
3. 멜랑콜리: 분노가 자기 자신을 향할 때
밀드레드는 범인을 잡고 싶어 한다. 그러나 그녀의 분노는 유난히 과잉되어 있다. 그 이유는 분명하다. 그녀가 벌하고 싶은 대상은 범인만이 아니라, 그 말을 내뱉었던 자기 자신이기 때문이다.
프로이트가 말한 멜랑콜리는 상실한 대상에 대한 분노가 외부로 향하지 못하고 자아 내부로 스며들어, 자기 비난과 자기 처벌의 형태로 굳어지는 상태다. 밀드레드의 분노는 정의의 얼굴을 하고 있지만, 실은 슬픔을 통과하지 않기 위한 자기 응징에 가깝다. 분노는 그녀를 움직이게 하지만, 애도하게 하지는 않는다.
4. 광고판의 이중성: 정의와 용서 사이
광고판은 “왜 범인을 잡지 않는가”라는 질문이면서 동시에, “나는 이 슬픔을 어떻게 견뎌야 하는가”라는 질문이다. 분노는 그녀를 무너지지 않게 지탱하지만, 동시에 애도를 유예한다. 슬퍼하는 대신 행동하고, 느끼는 대신 공격한다. 광고판은 그래서 애도의 대체물이다.
5. 오해와 이해: 윌러비 서장의 선택
죽은 딸의 관할 경찰서장이었던 윌러비의 죽음은 이 영화의 도덕적 균형을 무너뜨린다. 마을 사람들은 그의 자살을 밀드레드의 광고판이 그를 압박했기 때문이라며 화살을 돌리지만, 유서는 그 오해를 조용히 해체한다. 그의 선택은 말기 암이라는 개인적 고통의 결과였고, 더 이상 가족에게 쇠약해진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다는 절박한 결정이었다.
더 중요한 사실은 광고판 비용을 대신 지불한 인물이 바로 윌러비였다는 점이다. 분노의 대상이었던 공권력의 상징이, 가장 고요한 방식으로 밀드레드의 분노를 존중하고 있었다. 이해는 종종 분노보다 훨씬 조용한 얼굴로 존재한다.
6. 딕슨: 분노의 또다른 얼굴
딕슨 경관은 폭력적이고 미성숙한 인물로 쉽게 규정된다. 그러나 그는 분노 없이는 자기 자리를 유지할 수 없는 사람이다. 아버지의 죽음 이후, 어머니의 집에 머물며 권력의 외피로 분노를 휘두르고 살아온 인물. 윌러비의 죽음과 화상으로 망가진 자신의 몸 앞에서, 그는 처음으로 분노가 자신을 지켜주지 못한다는 사실을 마주한다. 그의 변화는 곧바로 윤리로 나아가지 않는다. 그는 여전히 분노를 행동으로 처리하려 한다. 다만 달라진 점이 있다면, 그 분노를 정당화해주던 세계가 무너졌다는 사실을 인식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영화의 마지막에서 밀드레드와 딕슨은 안젤라의 범인이 아닌, 다른 '강간범'으로 추정되는 인물을 응징하기 위해 함께 길 위에 오른다. 이 장면은 연대처럼 보이면서도 공모처럼 불안하다. 분노가 정의로 포장될 때, 폭력은 언제든 다시 시작될 수 있다. 영화는 그 경계에서 멈춘다.
7. 내 안의 광고판은 무엇을 향하고 있는가
《쓰리 빌보드》가 끝난 뒤에도 마음 한편이 오래 소란스러운 이유는, 영화 속 광고판이 어느새 내 안에 서 있기 때문이다. 말로는 다 하지 못한 감정, 아직 애도되지 않은 상실, 그리고 스스로에게 쉽게 허락하지 못한 용서들. 나는 그것들을 분노라는 문장으로 바꾸어 세워두고 살아온 것은 아닐까.
분노는 때로 나를 지켜주는 힘이 된다. 무너지지 않게 붙들어 주고, 슬픔의 바닥으로 곧장 떨어지지 않게 막아준다. 그러나 그 분노가 오래 자리를 차지할수록, 나는 더이상 묻지 않게 된다.
무엇을 잃었는지,
누구를 향해 화가 난 것인지,
그리고 그 화살이 언제부터 나 자신을 향하고 있었는지를.
밀드레드가 광고판을 세운 것은 세상을 바꾸기 위해서였을까, 아니면 더 이상 자기 마음을 안에만 두고 살 수 없었기 때문이었을까. 영화는 그 답을 말하지 않는다. 대신 질문을 남긴다.
분노가 멈추지 않는 자리에는 아직 슬퍼하지 못한 마음이 있을지도 모른다고.
영화가 끝난 뒤, 나는 내 안의 광고판 앞에 선다.
그 문장은 누구를 향하고 있는가?
나는 조심스럽게, 나에게 묻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