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풍이 지나가고> 지나간 것들을 바라보는 영화

가장 큰 태풍을 맞은 얼굴에 대하여

by 느리게걷는여자

1. 지나간 것들을 바라보는 영화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영화 〈태풍이 지나가고〉는 거대한 사건을 다루지 않는다. 대신 이미 지나가버린 것들, 되돌릴 수 없다는 사실을 모두가 알고 있지만 쉽게 말하지 않는 마음의 상태를 오래 바라본다. 이 영화가 보여주는 태풍은 실패한 어른의 삶이나 끝난 결혼 그 자체가 아니다. 오히려 가장 큰 태풍은, 말없이 그 모든 선택의 결과를 견뎌야 하는 아이의 세계를 통과해 지나간다.


2. 미련과 체념 사이에 선 어른

주인공 료타는 한때 문학상을 받은 작가였지만, 지금은 사설 탐정으로 살아간다. 그는 이혼했고, 양육비는 밀렸으며, 삶은 제자리걸음이다. 그러나 그는 스스로를 실패자로 규정하지 않는다. 과거의 영광은 이미 지나갔지만, 그것을 완전히 놓아버리기엔 아직 마음이 남아 있다. 그는 꿈을 믿는 것도, 버리는 것도 아닌 채, 미련과 체념 사이에서 흔들린다.


경마에서 딴 돈으로 아들 싱고에게 야구 방망이를 사주는 장면은 료타의 복잡한 마음을 드러낸다. 아이에게 아빠는 사회적 실패자가 아니다. 잠시라도 자신에게 온전히 머무는 아빠의 시간, 그 다정함이 아이의 하루를 채운다. 하지만 이 다정함은 늘 임시적이다. 그 뒤에는 어른이 감당하지 못한 현실이 남는다. 실패보다 사람을 지치게 만드는 것은, 실패 이후에도 끝내 정리되지 않는 마음이다.


3. 가장 큰 태풍을 맞은 얼굴

그런데 이 영화에서 가장 오래 남는 얼굴은 료타도, 전 아내 쿄코도 아니다. 싱고의 표정이다. 이혼은 흔히 어른들의 선택과 책임의 문제로 다뤄진다. 그러나 그 선택의 결과를 가장 직접적으로 겪는 존재는 아이다. 어른들에게 가족은 관계이지만, 아이에게 가족은 하나의 세계다. 그 세계가 둘로 나뉘는 순간, 아이는 아무 말 없이 자신이 살던 세계를 잃는다.


싱고는 울지 않는다. 매달리지도 않는다. 다만 어른들의 말과 침묵을 조용히 바라본다. 그 얼굴에는 이해하려 애쓰는 아이 특유의 조심스러움과, 이미 되돌릴 수 없다는 사실을 어렴풋이 알아차린 체념이 함께 깃들어 있다. 고레에다는 이 아이에게 설명을 주지 않는다. 대신 카메라는 오래 머문다. 말보다 표정이 더 많은 것을 말하고 있다는 듯이.


4. 태풍의 밤, 돌아갈 수 없다는 것을 아는 시간

태풍이 몰아친 밤, 료타와 쿄코, 싱고는 우연히 한 공간에 머문다. 비바람은 거세지만, 그 방 안에는 말보다 침묵이 많다. 이 하룻밤은 재결합의 가능성이 아니다. 오히려 돌아갈 수 없다는 사실을 서로가 이미 알고 있음을 확인하는 시간에 가깝다. 어른들은 각자의 삶으로 이동할 준비를 하지만, 아이는 그 선택을 받아들여야 한다.

전처 쿄코는 꿈을 버린 사람이 아니다. 그는 꿈보다 생활을 선택한 사람이다. 그것은 냉정함이 아니라 책임이다. 료타가 미련의 한가운데 서 있다면, 쿄코는 체념이 아니라 현실에 발을 디딘 어른이다. 그 둘의 간극은 사랑의 크기보다 삶을 대하는 태도의 차이다. 그리고 그 사이에서 아이는 선택권 없이 흔들린다.

영화 중: 싱고, 요시코, 쿄코, 료타


5. 포기라는 말이 아이에게 남길 것

다음 날, 태풍이 지나간 뒤의 세상은 완전히 달라지지 않는다. 다만 조금 젖어 있고, 조금 맑다.

료타의 어머니 요시코가 건네는 말은 그래서 오래 남는다.
“행복은 무언가를 포기하지 않으면 손에 쥘 수 없는 거란다.”


이 말은 료타에게는 선택에 대한 조언처럼 들리지만, 아이 싱고에게는 삶의 조건으로 남는다. 어른에게 포기는 선택이지만, 아이에게 포기는 선택 이전의 일이다. 싱고는 어떤 결정에도 참여하지 않았지만, 그 결정의 결과 속에서 살아가야 한다. 그는 가족이라는 하나의 세계를 잃고, 그 상실을 충분히 설명받지 못한 채 삶을 이어간다. 그럼에도 아이는 묻지 않는다. 울지 않는다. 다만 받아들인다.


어쩌면 우리는 모두 싱고와 비슷한 방식으로 살아왔는지도 모른다. 선택하지 않았지만 조건이 되어버린 일들, 원하지 않았지만 삶의 일부가 된 상실들 위에서. 〈태풍이 지나가고〉는 말한다. 성숙이란 모든 것을 지켜내는 일이 아니라, 잃은 것들과 함께 살아갈 수 있는 온도를 배우는 일이라고. 그래서 이 영화는 위로 대신 질문을 남긴다.
우리는 어떤 상실 위에서, 지금의 삶을 살아가고 있는가.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쓰리 빌보드>분노는 어디로 향하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