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하이데거의 존재론으로 읽는 특별해지지 않아도 괜찮은 하루
짐 자무쉬의 영화 《패터슨》은 무엇 하나 설명하거나 해명하려 들지 않는다. 뉴저지주 패터슨 시의 버스기사 패터슨은 매일 거의 같은 시간에 일어나, 같은 길을 걸어 출근하고, 같은 노선을 운행한다. 영화는 이 반복을 지루함으로 치부하지 않고, 오히려 집요하게 그 일상에 머문다. 이 단조로운 일상의 층위야말로 영화가 보여주고자 하는 존재의 핵심이기 때문이다.
세계-내-존재, 일상성에 머무는 방식
철학자 하이데거는 인간을 ‘세계-내-존재(In-der-Welt-Sein)’라고 정의했다. 이는 인간이 세계 바깥에서 세계를 객관적으로 관찰하는 주체가 아니라, 이미 그 세계 안에 던져져 살아가고 있는 존재라는 뜻이다. 우리의 삶은 위대한 결단의 순간보다, 이미 거기에 거주하며 살아가는 방식, 곧 일상성 속에서 그 존재가 더 분명하게 드러난다. 《패터슨》은 바로 이 하이데거적 일상성의 영화이자, 일상을 살아가는 존재에 대한 조용한 탐구다.
패터슨은 시인이기 이전에, 한 도시의 버스기사다. 그는 패터슨이라는 시에 살며, 도시의 소음과 리듬 속에서 하루를 보낸다. 출근길, 버스 안 승객들의 사소한 대화와 끊임없이 이어지는 이야기들은 그에게 단순히 배경이 아니라 세계 그 자체다. 하이데거의 말처럼, 그는 세계를 대상처럼 관찰하지 않고, 그 안에서 함께 호흡하며 존재한다. 그의 시는 삶을 해석하거나 초월하려 하지 않는다. 성냥갑, 폭포, 맥주잔처럼 손에 잡히는 사물들에서 시작한다. 이는 하이데거가 말한 ‘도구적 세계’와 닮아있다. 다시 말해, 세계는 머릿속에서 이해되는 것이 아니라, 하루를 살아내는 손과 몸을 통해 먼저 경험되는 것이다. 패터슨의 시는 세계를 설명하지 않고, 그저 세계의 곁을 조용히 지킨다.
흥미로운 점은, 패터슨이 시를 쓰면서도 끝내 자신을 ‘시인’이라 부르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그에게 시는 자신을 설명하는 직업이나 이름이 아니라, 하루를 살아가는 방식에 가깝다. 그는 시인이 되겠다고 말하지 않는다. 대신 출근 전 잠깐 시를 쓰고, 틈틈이 세상을 관찰하며 작은 노트에 메모를 남긴다. 시는 그의 삶을 특별하게 만들기보다, 그가 지금의 삶에 머물 수 있게 해주는 리듬이다. 그래서 패터슨은 이름 대신, 매일 반복되는 하루를 선택한다.
잠(Hypnos)과 죽음(Thanatos)의 쌍둥이, 일상의 이중성
영화는 매일 아침 패터슨이 잠에서 깨어나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이 반복적인 기상은 그리스 신화 속 잠(Hypnos)과 죽음(Thanatos)의 쌍둥이 모티프를 자연스레 떠올리게 한다. 잠은 일시적인 망각이자 휴식이며, 죽음은 영구적인 망각이다. 매일 잠에서 깨어난다는 것은, 패터슨이 죽음의 미세한 상태를 통과해 다시 세계로 복귀하며, 이 삶에 계속 머물겠다고 조용히 확인하는 의식처럼 보인다. 특히 일정한 시간에 아내와 나란히 눈을 뜨는 장면은, 이 반복이 단순한 습관이 아니라 함께 살아간다는 리듬임을 보여준다.
영화 곳곳에 스쳐 지나가는 쌍둥이들의 존재 역시 이러한 일상의 이중성을 환기한다. 닮은 얼굴들이 반복해서 등장하지만 완전히 같은 존재는 없듯, 반복되는 일상 속에는 언제든 멈출 수 있는 죽음의 가능성이 그림자처럼 공존한다. 하이데거에게 죽음은 삶의 끝에 도달하는 사건이 아니라, ‘나’라는 존재가 언제든 마주할 수 있는 가장 고유한 가능성이다. 잠에서 깨어나 시를 쓰는 패터슨의 모습은, 그 궁극적인 가능성을 등 뒤에 지고서도 지금 이 하루에 충실히 머무는 존재의 태도를 조용히 드러낸다.
균열과 공백, 존재를 드러내는 틈
늘 이어지던 일상의 리듬에 균열이 가는 순간들도 등장한다. 영화 중반, 패터슨이 몰던 버스가 갑자기 고장 나 멈춰 선다. 그러나 이 사건은 비극으로 확장되지 않는다. 하이데거에게 사건은 삶을 파괴하는 계기가 아니라, 존재를 다시금 드러내는 틈이다. 버스 고장은 패터슨의 삶을 바꾸지 않지만, 그가 이미 그 삶 속에 단단히 자리하고 있음을 오히려 확인시킨다. 비슷한 균열은 단골 호프집의 총기 소동에서도 발생하며, 이는 일상 속에서 타나토스가 언제든 예고 없이 침입할 수 있음을 보여준다.
그의 아내 로라는 이 일상에 끊임없이 변주를 더한다. 그녀는 새로운 꿈(컵케이크 사업, 기타 연주, 커튼 디자인)을 꾸고 실현하려 하지만, 패터슨의 반복을 '바꿔야 할 것'으로 취급하지 않는다. 이는 타인의 존재 방식을 침범하지 않고 서로의 다름을 인정하는 하이데거적 공존이다. 로라의 창조적인 일탈은 패터슨의 반복되는 일상을 배경으로 각자의 존재 방식을 완성한다.
가장 결정적인 균열은 패터슨의 시 노트가 강아지에 의해 완전히 찢어지는 장면이다. 그의 언어, 기록, 사유의 흔적이 한순간에 소멸한다. 이 절대적인 상실은 곧 공백으로 남는다. 그러나 이 공백은 그를 절망으로 이끌지 않는다. 상실의 충격 속에서 산책을 하던 패터슨은 일본인 시인을 만나 빈 노트를 건네받는다. 시인은 말한다. "시에는 끝이 없어요." 이 빈 페이지는 '무엇이든 써야 한다'는 명령이 아니라, 존재가 다시금 드러날 수 있는 가능성의 여백이다. 하이데거에게 공백은 결핍이 아니라, '열림'의 상태다.
당신은 지금, 당신의 삶에 머물고 있는가
영화는 다시 월요일 아침으로 돌아간다. 같은 시작, 같은 하루. 그러나 이 반복은 공허한 반복이 아니다. 패터슨은 여전히 그 자리에 있고, 여전히 세계 안에 거주하고 있다. 그는 잠에서 깨어 아내 곁에서 아침을 맞이하고, 단조로운 식탁 앞에 앉아 하루를 준비한다. 버스가 출발하기 전, 그는 시를 쓰고 다시 시내를 운행한다. 패터슨은 죽음의 가능성을 등 뒤에 둔 채, 일상이라는 리듬 속으로 조용히 자신을 내맡긴다.
영화《패터슨》은 삶이 극적으로 달라지지 않아도, 존재는 이미 충분히 드러나고 있다고 말한다.
삶이 특별해지지 않아도, 매일이 새로워지지 않아도, 우리는 이미 세계 한가운데에서 살아가고 있는 것처럼.
이 영화는 우리에게 더 특별해지라고, 더 성공하라고 말하지 않는다. 대신 아주 조용히, 하루의 리듬 속에 머물고 있는 우리 자신을 돌아보게 한다. 그리고 근원적인 질문 하나를 남긴다.
당신은 지금, 당신의 삶에 제대로 머물고 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