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비티> 상실 이후에도 우리는 다시 걸을 수 있을까

롤랑 바르트의 『애도일기』와 슬픔의 중력

by 느리게걷는여자

1. 허공에 흩뿌려진 시간, 우주라는 이름의 유배지

알폰소 쿠아론의 영화 <그래비티Gravity>는 광활한 우주의 정적으로 시작된다. 소리도, 공기도 없는 공간은 경이롭기보다 불안에 가깝다. 그러나 주인공 라이언 스톤 박사에게 이 적막은 낯설지 않다. 그녀는 이미 지구에서 중력을 잃은 사람이기 때문이다. 운전 중 받은 전화 한 통, “딸이 죽었다”는 비보 이후 그녀의 시간은 앞으로 나아가지 않는다. 하루는 지나가지만, 마음은 늘 그날의 사고 현장에 머물러 있다. 살아 있으나 삶 안에 들어와 있지 않은 상태. 상실 이후의 시간은 누구에게나 이렇게 낯설다.


영화는 이 멈춰버린 내면의 시간을 '우주'라는 물리적 공간으로 치환한다. 스톤이 마주한 우주는 재난의 현장이기 이전에, 거대한 애도의 풍경이다. 사랑하는 이를 잃은 뒤의 세계는 이전과 같은 질서로 작동하지 않는다. 아무것도 붙잡아 주지 않는 무중력 상태처럼, 상실을 경험한 자의 감정은 갈 곳을 잃고 부유한다.


철학자 롤랑 바르트는 어머니를 잃은 뒤 기록한 『애도일기』에서 슬픔을 설명되기보다 반복되고, 이해되기보다 몸에 남는 것으로 적는다. 애도는 끝내 정리되지 않으며, 시간 속에서 되풀이될 뿐이다. 스톤의 우주 유영은 바르트가 기록했던, 끝나지 않는 슬픔의 순례와 닮아 있다.


2. 놓아야 시작되는 순간

영화 초반, 우주 미아가 될 위기에 처한 스톤과 코왈스키를 하나로 묶어준 것은 테더(Tether)였다. 무중력의 망망대해에서 비행사가 길을 잃고 떠내려가지 않도록 동료와 이어주는 가느다란 안전 끈. 이 줄은 서로의 생사를 지탱하는 유일한 생명선이지만, 한편으로는 스톤을 과거의 슬픔에 단단히 묶어두는 집착의 고리처럼 보이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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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극은 재난의 결정적인 순간에 찾아온다. 캡슐의 낙하산 줄에 아슬아슬하게 걸린 두 사람에게 우주는 가혹한 선택을 강요한다. 줄 하나가 두 사람의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끊어지려 할 때, 코왈스키는 결단한다. 그는 스톤과 자신을 잇고 있던 테더의 고리를 스스로 풀어낸다. 상대를 살리기 위해 스스로를 칠흑 같은 허공으로 밀어낸 것이다. 이 장면은 애도의 본질을 날카롭게 관통한다. 누군가를 진정으로 사랑하고 떠나보낸다는 것은, 역설적이게도 그를 붙잡고 있는 손에 힘을 빼는 일이다. 기꺼이 손을 풀어줌으로써 타자와 나 자신을 자유롭게 하는 것이야말로 '이별의 완성'임을 영화는 시각적으로 은유한다.


하지만 홀로 남겨진다는 것은 감당하기 힘든 무게다. 코왈스키라는 유일한 지지대를 잃고 소유즈 캡슐 안에 갇힌 스톤에게, 이제 남은 것은 희박해진 산소와 침묵뿐이다. 물리적 산소 잔량이 줄어들수록 그녀의 삶에 대한 의지도 함께 희미해진다. 그녀는 모든 시스템을 끄고 멈출 수 있는 선택 앞에 선다. 그때 죽음의 문턱 앞에서 들려오는 아닝가의 라디오 교신. 이해할 수 없는 언어 너머의 개 짖는 소리와 아기의 울음은 그녀가 외면해왔던 지구의 생명력이자, 상처받은 자들이 여전히 부대끼며 살아가는 세상의 소음이다. 타자의 삶에 공명한 순간, 스톤은 처음으로 아이처럼 울음을 터뜨린다. 그리고 그녀의 무의식은 코왈스키라는 환각을 빌려와 삶의 방향을 가리킨다. "가야지(Go)." 그것은 환청이 아니라, 삶이 그녀에게 보내는 마지막 요청처럼 들린다.


3. 중력, 나를 끌어내리는 고통이자 나를 세워주는 힘

스톤이 에어락에 들어와 우주복을 벗어 던지고 태아처럼 웅크리는 장면은 영화에서 가장 아름다운 '탄생'의 은유다. 탯줄 같은 호스들이 그녀를 감싸고, 비로소 깊은 숨이 돌아온다. 상실로 인해 죽어있던 감각이 다시 태동하는 순간이다.


지구로 귀환하는 과정은 불길에 휩싸인 대기권 진입이라는 통과의례를 거친다. 고통은 사라지지 않는다. 다만 그 고통을 통과하며, 인간은 다시 삶의 조건 안으로 들어온다. 애도는 고통을 제거하는 일이 아니라, 그 무게를 감당할 몸을 회복하는 일에 가깝다.


마침내 물속에서 빠져나와 진흙을 움켜쥐는 순간, 스톤은 곧바로 걷지 못한다. 중력의 하중을 이기지 못해 비틀거리고, 무거운 몸을 간신히 일으켜 세운다. 이 장면이 오래 남는 이유는 그것이 완전한 회복을 약속하지 않기 때문이다. 다만 다시 중력을 받아들이는 일, 다시 상처받을 수 있는 세계 안으로 돌아오는 결심을 보여줄 뿐이다.


4. 애도 이후에도 삶은 선택된다

롤랑 바르트는 애도를 기적이 아니라 반복되는 '노고'에 가까운 것으로 기록했다. 매일 아침 상실이라는 거대한 중력을 이겨내고 무거운 몸을 일으키는 일. 그의 글은 애도가 끝내 완성되지 않을 수도 있는 시간임을 고요하게 증언한다.


《그래비티》는 바로 그 지점에서 바르트의 비극을 넘어선 희망을 보여준다. 스톤 박사가 진흙을 움켜쥐며 일어설 때, 그녀의 슬픔이 사라진 것은 아니다. 다만 그녀는 슬픔이라는 바다에 영원히 잠기기를 거부하고, 그 심연을 가슴으로 껴안은 채 대지를 딛기로 결심한다. 진정한 애도란 슬픔이 없는 상태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슬픔을 품고도 다시 삶을 향해 한 발 내딛는 용기다.

비틀거리면서도 끝내 직립하는 그녀의 뒷모습은 우리에게 말해준다.

상처 입은 채로도 우리는 다시 걸을 수 있으며, 삶은 여전히 우리에 의해 선택될 준비가 되어 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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