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르> '착잡한 존재'가 되지 않을 권리에 대하여

― 질문으로 남는 사랑(Amour)

by 느리게걷는여자

9 1. 장면 속에 비친 미래

미하엘 하네케 감독의 영화 <아무르(Amour)>는 시작과 동시에 소방대원들이 문을 부수고 들어가 안느의 시신을 발견하는 차가운 소음을 먼저 들려준다. 이는 관객으로 하여금 ‘죽느냐 사느냐’라는 서사적 궁금증을 버리고, 그 죽음에 이르기까지의 처절한 ‘과정’에만 온전히 집중하게 하려는 의도처럼 보인다. 이로써 우리는 예정된 비극을 향해 걸어가는 두 사람의 손을 잡고, 그 고립된 사투 속으로 함께 걸어 들어가는 목격자가 된다.


이 과정을 지켜보는 시간은 '지나온 기억과 다가올 두려움'이 처절하게 교차하는 지점이다. 요양원에서 조금씩 생기를 잃어가며 알 수 없는 말을 되풀이하시던 할머니의 모습은 스크린 속 주인공 안느의 모습과 너무도 닮아 있었다. 쇠약해져 가는 육체를 지켜보는 일은 단순히 영화속 장면을 목격하는 것 이상이다. 그것은 머지않은 미래에 마주하게 될 부모님의 모습이자, 언젠가 거울 속에 비칠 나의 미래일지도 모른다는 서늘한 자각이다. 영화는 우리에게 묻는다. 생의 마지막 문턱에서 우리는 '비참한 생존'과 '존엄한 죽음' 사이 중 어디쯤에 서 있게 될 것인가를.


2. 존경의 무게가 '착잡함'으로 변할 때

안느는 제자에게 있어 어린 시절부터 삶의 지표와 같은 존경의 대상이었다. 스승의 가르침 아래 피아노 선율을 완성해갔던 제자에게 안느는 결코 무너지지 않을 예술적 성채와도 같았을 것이다. 하지만 반신불수가 된 안느를 방문한 제자가 보낸 카드 속에 담긴 "선생님을 뵙고 마음이 착잡했다"라는 메모는, 그 견고했던 존경의 자리에 연민이라는 낯선 감정이 들어찼음을 시사한다.


타인에게 ‘착잡한 존재’가 된다는 것. 그것은 평생 쌓아온 한 인간의 품격과 지성이 타인의 시선 속에서 한낱 안타까운 풍경으로 전락했음을 의미할지 모른다. 안느가 제자의 음반을 황급히 꺼버리고 표정이 굳어졌던 이유는, 자신을 우러러보던 이의 눈에 비친 '동정받는 자신'의 모습을 견딜 수 없었기 때문일 것이다. 연민은 때로 사랑보다 잔인하다. 그것은 상대를 대등한 인간이 아닌, 보살핌이 필요한 '대상'으로 규정해버리기 때문이다. 안느에게 있어 '착잡한 존재'로 남지 않을 권리는, 곧 인간으로서의 마지막 자존심을 지키는 일이었다.


3. 건반 위를 수놓던 열 손가락의 침묵

음악가에게 손은 영혼의 언어와도 같다. 영화 속 안느의 한쪽 손이 서서히 굽어버린 모습은 단순히 육체적 장애를 넘어, 그녀의 세계가 닫히고 있음을 보여주는 가장 가슴 아픈 시각적 상징이다. 건반 위를 유려하게 수놓으며 아름다운 화음을 만들어내던 그 손가락들이 마디마디 굳어 제 기능을 잃어가는 과정은, 안느에게는 자신의 정체성이 소멸해가는 과정과 다름없었을 것이다.


침대 위에서 뜻하지 않은 소변 실수를 한 이후, 안느의 상태가 급격히 악화되는 과정 역시 같은 맥락으로 읽힌다. 인간이 지키고자 하는 최소한의 통제권, 즉 마지막 존엄이 무너졌을 때 육체 또한 그 흐름을 따라 얼마나 빠르게 무너질 수 있는지를 영화는 조용히 응시한다.


4. 박제된 풍경과 일그러진 현실의 대조

안느의 집 곳곳에 걸려 있던 피에르 앙리 드 발랑시엔(Pierre-Henri de Valenciennes)의 풍경화들은 정적인 고요함을 머금고 있다. <아브루초 산맥의 경치>와 같은 인상파의 숨결이 느껴지는 그 그림들은 역설적이게도 멈춰버린 시간을 상징한다. 육체는 고통 속에서 굽어지고 일그러지는데, 벽 위의 풍경은 여전히 평온하다는 사실이 삶과 죽음의 경계를 더 위태롭게 만든다. 아무리 위대한 예술도 인간의 소멸 앞에서는 무력한 장식에 불과할 수 있다는 서글픈 대조다.


집 안으로 날아든 비둘기 역시 묘한 긴장감을 준다. 처음 비둘기를 쫓아낼 때 조르주의 손길이 거부의 몸짓이었다면, 안느의 사후에 다시 찾아온 비둘기를 테이블보로 살며시 포획해 품에 안는 행동은 사뭇 다르다. 그것은 어쩌면 고통의 굴레에서 벗어난 안느의 영혼을 비로소 마주하는 조르주만의 방식이었을 수 있다. 혹은, 홀로 남겨진 이가 마주한 또 다른 생명에 대한 뒤늦은 위로이자 수용이었을 것이다.


5. 사랑이라는 이름의 방관과 헌신

딸의 모습은 또 다른 질문을 던진다. 가끔 들러 말로만 걱정을 쏟아내고, 아버지를 몰아세우며 죄책감을 전가하는 그녀의 모습은 직접 간병의 고통을 짊어지지 않은 자의 모습을 보여준다. 반면, "무엇이 진지한 거냐"고 되묻던 조르주의 반문은 묵직하다. 매일 비명을 지르는 아내의 입에 물 한 모금을 넘겨주기 위해 사투를 벌이며, 거부하는 입술 사이로 삶의 마지막 조각을 밀어 넣어야 하는 자만이 '진지함'에 대해 말할 자격이 있기 때문이다. 사랑은 화려한 수사가 아니라, 묵묵히 무너져가는 이를 지탱하는 잔인하고도 숭고한 노동임을 조르주의 굽은 등은 침묵으로 보여준다.


6. 맺으며: 질문 앞에 멈춰 서는 사랑

조르주가 선택한 '아무르(사랑)'의 결말은 안느가 거부했던 ‘착잡한 존재’로서의 연명을 끊어준 유일한 해방이었을지도 모른다. 안느가 원했던 것은 타인의 연민 속에 박제되는 것이 아니라, 마지막 순간까지 자기 자신으로 존재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누군가의 삶이 '착잡한 풍경'으로 화해가는 길목에서, 당신은 과연 어떤 사랑으로 그 곁을 지킬 것인가. 그 서늘한 질문 앞에서 우리는 각자의 삶을 투영하며 길게 머무를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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