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일의 휴가>기억이라는 이름의 삶의 연료

기억은 인연이다

by 느리게걷는여자

멈춰버린 엔진, 불량 휘발유가 된 기억

육상효 감독의 영화 〈3일의 휴가〉는 저승 백일장에서 시가 입선된 엄마 ‘복자’가 사흘간의 휴가를 얻어 딸 ‘진주’를 만나러 오는 이야기다. 대학 교수로 성공한 삶을 살고 있을 것이라 믿었던 것과는 달리, 딸은 고향 집의 정적 속에서 삶이 멈춘 얼굴로 하루를 견디고 있었다.


영화 속에서 진주가 상담을 받던 정신과 의사는 기억을 ‘연료’에 비유한다.

"좋은 기억은 삶을 매끄럽게 달리는 고급 휘발유가 되지만,

나쁜 기억은 삶을 끊임없이 덜컹거리게 만드는 불량 휘발유가 된다"고 말이다.

진주의 삶은 오랫동안 덜컹거렸다. 미국 대학교수라는 성공의 이면에는 “엄마가 나를 버렸다”는 오래된 원망과, 엄마의 죽음 이후에야 도착한 “엄마도 방법이 없었겠구나”라는 이해가 뒤엉켜 있었기 때문이다.


이해라는 이름의 늦게 도착한 편지

과거, 가정부 일을 하며 딸과 단둘이 월셋방조차 내기 버거웠던 엄마 복자는 큰 결심을 한다. 자신의 희생으로 공부하여 교직에 자리 잡은 남동생 부부에게 어린 진주를 맡긴 것이다. 엄마의 소망은 단 하나였다. 딸만큼은 자신과 다른 인생을 살기를, 더 많이 공부하고 더 넓은 세상으로 나가기를 바랐을 뿐이다. 그러나 보호자의 품이 세상의 전부였던 어린 진주에게 이 상황은 논리적인 선택이 아닌, 엄마가 나를 버렸다는 지울 수 없는 상처로 남았다.


이해는 때로 너무 늦게 도착해 우리를 구하지 못한다. 오히려 그 늦음 때문에 우리는 스스로를 벌하게 된다. 생전의 엄마에게 모질게 굴었던 기억은 엄마의 부재와 동시에 날카로운 죄책감이 되어 되돌아 온다. "엄마도 그럴 수밖에 없었겠구나"라는 깨달음이 엄마의 사후(死後)에 찾아왔을 때, 그것은 위로가 아니라 자신을 향한 채찍이 된다. 그 죄책감은 삶의 엔진에 불량 휘발유처럼 쌓여 진주를 마비시킨다. 그녀는 미처 엄마가 살아 있을 때는 쉽게 옮기지 못했던 발걸음을, 이제는 엄마의 빈집으로 향하여 스스로를 유폐하듯 시간을 보낸다. 엄마의 헌신으로 일궈진 자신의 성공 앞에서, 차마 그 삶을 누릴 자격이 없는 사람처럼.


레시피에 깃든 시간: 베르그송의 지속

이 영화의 정서는 프랑스 철학자 앙리 베르그송의 ‘지속(Durée)’ 개념과 깊게 맞닿아 있다. 베르그송에게 시간은 과거와 현재가 칼로 자르듯 분리된 직선이 아니라, 서로 스며들며 흐르는 하나의 유기적인 운동이다. 과거는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현재 속에 겹쳐져 머문다. 진주가 엄마의 공간에서 엄마의 레시피를 복기하며 음식을 만들어 먹는 장면들은 바로 이 ‘지속’을 시각적으로 드러낸다.


매운 것을 잘 먹지 못하는 딸을 위해 무를 넣어 단맛을 낸 만두, 딸의 생일마다 빠지지 않던 잡채. 진주가 그 레시피를 따라 음식을 만들고 그 공간의 공기를 견디는 시간은 단순한 추억이 아니다. 그것은 과거에 매몰되는 행위가 아니라, 과거의 엄마가 현재의 진주에게로 흘러들어와 함께 숨 쉬는 시간이다. 현재의 칼질 소리 속에 엄마의 도마 소리가 겹쳐질 때, 시간은 비로소 ‘지속’이 된다. 진주는 이 과정을 통해 멀리서 바라보던 엄마의 풍경속으로 천천히 걸어들어 간다. 그리고 마침내, 엄마가 서 있던 자리에서 엄마의 삶을 이해하기 시작한다.


기억의 소멸, 사랑의 가장 숭고한 거래

저승의 가이드는 말한다. “기억이 바로 인연입니다.” 베르그송이 말한 ‘순수 기억’은 특정 장면으로 고정된 사진첩 같은 기억이 아니라, 한 사람의 삶 전체를 감싸는 정신의 층위다. 진주를 괴롭힌 것은 ‘나를 버린 엄마’라는 단편적이고 왜곡된 이미지였지만, 복자가 남긴 마지막 진심은 그 기억의 구조 자체를 뒤흔든다.


“내 인생에 니를 꿈에라도 버린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이 한 문장은 과거를 지우지 않는다. 대신 과거의 색깔을 바꾼다. 원망으로 고착되어 엔진을 망가뜨리던 불량 휘발유는, 이 고백을 통해 미안함과 고마움이라는 투명한 연료로 정화된다. 기억이 바뀌자 인연이 바뀌고, 인연이 바뀌자 삶은 다시 도약한다. 억눌려 삶을 가로막고 있던 거대한 에너지가 비로소 앞으로 나아가는 동력으로 전환되는 순간이다.


복자가 저승사자와의 거래를 통해 얻게 된 진주와의 마지막 대면에서, 진주가 엄마에게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차려주는 생일상은 ‘자기 처벌의 끝’이자 ‘사랑의 수용’을 의미한다. 평생 엄마가 해준 음식을 먹으며 원망만 품어왔던 딸이, 이제는 엄마의 레시피를 온전히 재현해 엄마에게 대접한다. 이 행위는 “이제야 엄마의 마음을 받아들인다”는 무언의 화해다.


영화의 끝에서 사라지는 것은 엄마 복자의 존재가 아니라, 복자가 품고 있던 딸에 대한 기억이다. 평생 딸 하나만을 바라보고 살아온 복자에게 딸이 자신의 기억 속에서 잊혀지는 것은 정체성의 소멸을 의미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복자는 기꺼이 그 소멸을 선택한다. 이 기억의 소멸은 파괴가 아니라 건넴이다. 복자는 딸의 기억 속에 '박제'되는 대신, 딸이 '살아갈 수 있는 현재'를 유산으로 남긴다. 자신을 기억하는 에너지가 딸을 벌하는 연료가 되지 않도록, 스스로를 태워 딸의 내일을 밝히는 빛이 된 것이다.


에필로그: 이제 당신의 생에 휴가를 허락할 시간

〈3일의 휴가〉는 우리에게 조용히 묻는다. 당신의 삶을 덜컹거리게 하는 그 기억의 정체는 무엇인가. 혹시 너무 늦게 도착한 이해 때문에, 혹은 누군가를 원망하는 마음이 너무 커서 아직도 스스로를 벌주며 멈춰 서 있지는 않은가.


복자가 자신의 기억을 지우면서까지 딸에게 선물하고 싶었던 것은 죄책감에 억눌리지 않은 평범한 일상이었다. 당신의 삶도 누군가의 간절한 희생과 사랑으로 빚어진 소중한 결과물이다. 그러니 이제는 자신을 향한 채찍질을 멈추고, 한 번쯤은 자신에게 진짜 ‘휴가’를 허락해도 되지 않을까.


불량 휘발유를 비워낸 자리에 미안함과 고마움이라는 맑은 연료를 채워 넣을 때, 삶의 엔진은 비로소 가장 경쾌한 소리를 내며 다시 달리기 시작할 것이다. 기억이 인연이라면, 이제 당신의 기억을 사랑의 연료로 채워 넣을 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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