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니어스>관계라는 글을 지속하는 여백의 힘

범람하는 글자들을 품어낸 빈칸

by 느리게걷는여자

1. 경계를 긋는 모자와 범람하는 문장

1929년 뉴욕. 모든 출판사에서 거절당한 방대한 원고 뭉치가 전설적인 편집자 맥스 퍼킨스의 책상 위에 놓인다. 혼돈에 가까운 문체, 그러나 그 무질서 속에서 퍼킨스는 압도적인 재능의 맥박을 알아본다. 세상의 기준에 맞지 않던 야생의 글을 문학의 영역으로 이끌기로 결심하는 순간, 영화 〈지니어스〉는 단순한 천재 작가의 성공담을 넘어선다. 그것은 한 인간이 다른 인간의 존재를 어디까지 '감당'할 수 있는가를 묻는 치열한 선택의 기록이 된다.


영화 속 맥스 퍼킨스(콜린 퍼스 분)는 식탁 앞에서도, 사랑하는 아이들 곁에서도, 가장 사적인 공간에서도 모자를 벗지 않는다. 단순히 쉬지 못하는 워커홀릭이라서가 아니다. 그에게 ‘편집자’라는 역할은 직업을 넘어선 생의 질서다. 그는 이 질서를 고수함으로써 세계의 불확실성으로부터 자신과 가족을 보호한다. 그러나 그 견고한 모자 아래에는, 끝내 날것의 자신으로는 드러나지 못한 한 인간의 고독이 고여 있다.


반면 토머스 울프(주드 로 분)는 정반대의 극점에 서 있다. 그는 늘 넘친다. 말이 넘치고, 문장이 넘치고, 제어할 수 없는 감정이 범람한다. 멈추지 못하는 에너지, 그것이 그의 재능이자 불행의 씨앗이다. 데뷔작 『천사여, 고향을 보라』의 기록적인 성공 이후에도 그는 안식하지 못한다. 5,000페이지에 달하는 두 번째 원고를 폭포처럼 쏟아낼 뿐이다. 성공은 그를 침잠시키지 못하고 오히려 더 격렬하게 휘저어 놓는다. 그는 흐르는 강물처럼 거침없이 쓰고 싶어 하면서도, 동시에 자신을 붙잡아 줄 ‘아버지의 자리’라는 단단한 닻을 갈구하는 흔들리는 영혼이다.


2. 스토아적 평정과 통제 불능의 자아

스토아 철학은 인간을 아주 명료한 기준으로 나눈다. 내가 통제할 수 있는 것과 통제할 수 없는 것을 구분할 줄 아는 사람, 그리고 그 경계를 혼동하여 고통에 빠지는 사람. 톰 울프는 전형적인 후자다. 그는 타인의 인정, 시장의 환호, 명성의 크기라는 가변적인 외물에 자신의 중심을 맡겨버린다. 찬사를 받을수록 더 불안해지고, 성공할수록 더 과잉되는 이유는 자신의 존재 가치를 외부의 시선이라는 변덕스러운 바람에 걸었기 때문이다.


맥스는 다르다. 그는 작가의 천재성을 자신의 의지로 통제하려 들지 않는다. 다만 그것을 세상이 읽을 수 있는 형태로 다듬고, 자르고, 구조를 세울 뿐이다. 쓰지 않지만 읽고, 소리 높여 말하지 않지만 묵묵히 기둥을 세운다. 그는 욕망의 전면에 서서 박수받기를 거절하며, 한 발 물러난 자리에서 자기 몫의 책임을 묵묵히 수행한다. 그가 집 안에서도 모자를 벗지 않는 태도는, 타인의 뜨거운 광기와 천재성이 자신의 내면을 잠식하지 못하도록 세운 최소한의 성벽이자 자기 통제의 상징처럼 보인다.


3. 관계의 시작보다 위대한 ‘지속’의 힘

이 둘의 우정은 단순한 결속을 넘어선 '감당'의 시험대였다.

톰 울프는 매혹적인 불꽃이다. 누구라도 그 뜨거움에 매료되어 급격히 친해지기는 쉽다. 그러나 그 불길 곁에서 자신의 형태를 유지하며 관계를 ‘지속’하는 일은 전혀 다른 차원의 인격을 요구한다.

톰의 연인 엘린(니콜 키드먼 분)이 관계에서 물러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그녀는 연인이기 전에, 울프의 문장을 가장 먼저 받아낸 첫 독자였다. 그녀가 톰과의 관계를 정리한 이유는 사랑이 식어서가 아니다. 톰이라는 거대한 파도에 밀려나 사라져가는 자신의 자리를 자각했기 때문이다. 그녀의 떠남은 냉정함이 아니라, 자기 존엄을 지키기 위한 결단이다. 사랑은 순간의 감정으로 시작될 수 있지만, 지속은 내 삶의 여백을 내어주는 책임과 윤리의 문제임을 그녀는 깨달은 것이다.


반면 맥스는 톰을 끝까지 감당해낸다. 그에게는 타인의 무례와 불안정함조차 삶의 풍경으로 품어 안을 수 있는 단단한 인격적 구조가 있다. <위대한 개츠비>의 성공 이후, 정신병원에 있는 아내를 돌보느라 단 한 줄의 글도 쓰지 못하는 피츠제럴드를 조용히 후원할 때도, 맥스는 상대를 분석하거나 비난하지 않는다. 그저 곁에 머물며 그 무게를 함께 견딜 뿐이다. 톰이 배신하고 떠났을 때조차 딸에게 “누구나 혼자일 때가 필요한 법이란다”라고 건네는 그의 말은, 이해를 넘어선 거대한 수용이다. 그것은 판단이 아니라 태도이며, 분석이 아니라 포옹이다.


4. 고독한 성숙이 남긴 질문

그러나 톰에게 맥스는 안식인 동시에 거대한 벽이었다. 톰은 맥스를 사랑했지만, 맥스의 완벽한 질서 앞에서 비춰지는 자신의 한계를 견디지 못했다. 정제된 구조는 그에게 평온을 주었으나 동시에 예술가적 야생성을 거세하는 공포로 다가온듯 하다. 그래서 그는 떠난다. 그리고 더 격렬하게 맥스를 부정하는 장면도 나온다. 이것은 배신이라기보다, 흐르는 강물로서 존재하기 위해 자신을 묶어둔 밧줄을 끊어내려는 필사적이고 서툰 저항이다.


영화의 말미, 톰의 죽음 이후 맥스는 편지를 읽기 전 비로소 중절모를 벗는다. 맥스가 모자를 벗는 장면은 영화의 처음이자 마지막이다. 평생을 지켜온 ‘편집자’라는 역할을 내려놓고, 처음으로 무방비한 한 인간으로서 상실과 마주하는 순간이다. 더 이상 고칠 문장도, 붙잡을 관계도 남지 않았을 때 그는 침묵한다. 통제할 수 없는 타인의 죽음과, 오로지 자신만이 통제할 수 있는 ‘슬퍼할 권리’를 분리해낼 줄 아는 자의 고요한 평정이다.


〈지니어스〉는 관계의 시작과 지속이 전혀 다른 문제임을 조용히 보여준다. 관계의 시작은 감정일지 모르나, 관계의 지속은 결국 ‘수용’의 문제다. 그리고 누군가를 수용한다는 것은 단순히 감정을 억누르는 인내가 아니다. 타인의 연약함과 배신, 그로 인한 자신의 고독까지도 삶의 일부로 받아들이면서 끝내 자신을 잃지 않는 균형감이다. 맥스 퍼킨스가 우리 기억 속에 오래 남는 이유는 그가 위대한 작품을 만들어낸 편집자이기 때문이 아니라, 끝내 자기 삶을, 그리고 타인의 생을 수용할 줄 아는 성숙한 인간이었기 때문이다.


영화는 조용히 우리에게 묻는다.

당신은 지금 누군가와 관계 맺고 있는가.

그렇다면, 그를 당신의 삶 안에 어디까지 들여놓을 수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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