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드나잇 인 파리>황금시대를 향한 망명

왜 우리는 지금이 아닌 다른 시간을 꿈꾸는가?

by 느리게걷는여자

우디 앨런의 2011년 작 〈미드나잇 인 파리Midnight in Paris〉는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는 낭만적인 판타지의 외피를 두르고 있지만, 그 심연에는 한 개인이 불확실한 현재에 머물 용기를 얻기까지의 치열한 실존적 질문이 담겨 있다. 영화는 반복해서 묻는다. "왜 우리는 지금이 아닌 다른 시간을 꿈꾸는가?"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 우리는 쇠렌 키에르케고르(Søren Aabye Kierkegaard)의 철학적 이정표를 따라 주인공 길 펜더의 여정을 추적해 볼 필요가 있다. 길의 방황은 단순히 취향의 문제가 아니라, 불안을 견디지 못한 자아가 선택을 유예하며 벌이는 고독한 망명이기 때문이다.


1. 불안: 자유가 선사하는 현기증

주인공 길 펜더는 할리우드의 성공한 시나리오 작가다. 약혼자 이네스의 부모님을 만나러 파리에 온 여행자이다. 통속적인 할리우드와 달리 파리는 그에게 낭만과 예술 그 자체이다. 길은 자신을 늘 ‘소설을 써야 하는 사람’이라 정의하며 현실의 변두리를 부유한다. 그는 지금 이 순간을 살고 있지만, 마음은 늘 다른 시간, 다른 공간에 가 있다. 아직 아무에게도 보여주지 못한 소설의 문장들, 아직 도착하지 않은 진짜 자신에 대한 갈망이 그를 흔든다.


키에르케고르의 말처럼 길은 자유 앞에서 멈춰 선 사람이다. 그는 무엇이든 될 수 있다는 무한한 가능성 앞에서, 동시에 그 선택이 자신의 본질을 결정지어 버릴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을 느낀다. 키에르케고르는 이러한 상태를 ‘자유의 현기증’이라 불렀다. 길의 불안은 무능의 증거가 아니라, 아직 진정한 삶의 방향을 결정하지 않았다는 실존적 신호다. 약혼녀 이네즈와 그녀의 가족, 그리고 지적 허영심에 매몰된 폴 일행은 길이 마주해야 할 실존적 고뇌를 '시대착오적인 취향'으로 치부하며 그를 관람객의 삶으로 밀어 넣는다. 자정의 종소리와 함께 나타나는 낡은 푸조 자동차는 그에게 달콤한 도피처를 제공한다.


2. 자정의 파리, 책임이 유예되는 환상

푸조 자동차는 단순한 타임머신이 아니다. 그것은 길이 현실의 압박에서 잠시 빠져나갈 수 있도록 허락된 심리적 비상구다. 1920년대의 파리에서 그는 헤밍웨이와 술을 마시고, 파블로 피카소 등 그 시대 예술가들의 든든한 후원자였던 거트루드 스타인의 거실에서 자신의 원고를 내민다. 그곳에서 길은 잠시 안정을 얻는다. 이미 역사가 되어버린 시대, 모든 평가가 끝나 '위대함'이라는 박제된 이름으로 남은 거장들 곁에 머물며 그는 자신의 미완성된 삶을 정당화한다.


재미있는 것은, 길이 만난 거장들 역시 지독한 불안에 시달리고 있다는 사실이다. 헤밍웨이는 길에게 죽음이 두렵지 않느냐고 집요하게 묻는다. 그가 강조하는 ‘용기’와 ‘사랑’은 사실 삶이 언제든 무너질 수 있다는 공포를 정면으로 응시하라는 촉구다. 키에르케고르의 관점에서 볼 때, 불안은 시대의 결함이 아니라 인간 실존의 기본 조건이다. 길은 거장들의 찬란한 아우라 곁에서 위로를 받지만, 동시에 그 그림자 뒤로 숨어 자신의 현실을 망각하려 한다.


3. “왜 그는 눈치채지 못하죠?” — 부정을 뚫고 나오는 진실

거트루드 스타인은 이 영화에서 길의 자아를 일깨우는 가장 중요한 조력자로 등장한다. 그녀는 길의 원고를 평하며 예리한 질문을 던진다. 약혼녀가 바람이 났는데, 왜 소설 속 남자 주인공은 그 사실을 전혀 알아차리지 못하느냐는 것이다. 길은 스스로에게 답한다. “부정(Denial)이죠.”


이 순간, 소설 속 픽션과 길의 리얼리티는 하나로 합쳐진다. 현실의 이네즈는 이미 길에게서 멀어져 있다. 그녀는 길의 소설가로서의 욕망을 유치한 몽상으로 취급하고, 현학적인 폴의 언어에 매혹된다. 길은 이 모든 신호를 이미 알고 있었으나 선택하기를 거부했을 뿐이다.


키에르케고르는 이를 ‘죽음에 이르는 병’, 즉 절망이라 불렀다. 이는 신체적인 죽음이 아니라, 나 자신이 누구인지 잊어버리고 나답게 살기를 포기한 채 영혼이 죽어가는 ‘절망’을 의미한다. 스타인은 "작가는 도망치지 않는 사람(Someone who does not run away)"이라고 말하며 길에게 환상이 아닌, 그가 부정하고 있는 현재를 정면으로 응시할 것을 주문한다. 그녀의 조언은 길에게 있어 패배주의를 걷어내고, 환상이라는 구경꾼의 자리에서 내려와 자기 삶을 정면으로 책임지는 실존적 행위자로 서게 만드는 결정적인 계기가 된다.


4. 황금시대와 아드리아나라는 거울

길과 아드리아나가 벨 에포크 시대(Belle Époque:1871~1914)로 이동하는 장면은 이 영화의 철학적 정점이다. 1920년대를 동경하던 길은, 정작 벨 에포크 시대의 고갱과 드가가 현재를 냉소하고 르네상스를 그리워하는 광경을 목격한다. 황금시대는 언제나 ‘지금’이 아닌 ‘그때’에 있다. 이는 현재의 불완전함을 견디기 어려울수록 과거를 신화화하는 인간 심리의 구조적 모순이다.


예술가들의 뮤즈로 등장하며 길의 마음을 사로잡았던 아드리아나는 키에르케고르가 말한 '미적 단계(Aesthetic stage)'를 상징하는 인물이다. 그녀는 늘 더 아름다운 자극과 낭만적인 환상을 쫓으며, 지루한 현실로부터 끊임없이 망명한다. 아드리아나가 벨 에포크에 남겠다고 결심하는 순간, 길은 거울은 본 듯 자신의 모습을 발결함과 동시에 마침내 황금시대의 실체를 깨닫는다. "황금시대는 결코 도달 가능한 장소가 아니다." 어느 시대에 가도 인간은 죽음을 두려워하고 의미를 갈망한다. 아드리아나가 더 눈부신 환상 속으로 숨어버리는 쪽을 택할 때, 길은 비로소 환상의 마차에서 내릴 준비를 마친다. 그녀는 길이 넘어서야 할 최후의 유혹이자, 현재를 선택하기 위해 반드시 놓아야 할 '과거' 그 자체였기 때문이다.


5. 비를 맞는 현재라는 자리: 실존적 귀환

길은 아드리아나의 손을 놓고 2010년의 파리로 돌아온다. 이 선택은 낭만의 포기가 아니라, 자기 삶을 살겠다는 결단이다. 이전의 길이 위대한 작가들의 이름 뒤에 숨어 글을 썼다면, 이제 그는 실패할 가능성을 포함한 자신의 문장을 쓰기 시작한다. 더 이상 승인된 언어를 빌려 자신을 보호하지 않고, 미완의 상태 그대로 삶을 기록하겠다는 태도의 변화다.


이네즈와의 결별 역시 마찬가지다. 이네즈는 단순한 연인이 아니라, 안정과 효율, 사회적 승인이라는 세계의 얼굴이다. 길이 그녀를 떠나는 것은 한 관계의 실패가 아니라, 자신의 본질을 외면한 채 타인의 기대에 맞춰 살아야 하는 '장식적인 삶'을 더 이상 살지 않겠다는 선언이다.


영화의 마지막, 길은 비 내리는 파리 거리를 걷는다. 비는 낭만적 소품이기 이전에 피할 수 없고 불편한 현실의 상징이다. 그러나 바로 그 지점에서 그는 가브리엘을 만난다. 그녀는 박제된 과거의 뮤즈가 아니라, 지금 이 순간의 빗방울을 함께 맞으며 취향을 공유할 수 있는 실존하는 타자다.


"삶은 이해되기 위해 뒤돌아보는 것이지만, 살기 위해선 앞을 향해 나아가야 한다"는 키에르케고르의 잠언처럼, 길은 이제 자신의 두 발로 축축한 땅을 딛고 서 있다. 그는 더 이상 자정의 마차를 기다리지 않는다. 맑은 날이든 비 오는 날이든, 그가 서 있는 곳이 곧 그의 삶임을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6. 자기 삶의 작가가 된다는 것

우리는 모두 저마다의 황금시대를 꿈꾸며 산다. 어제보다 나았던 과거, 혹은 모든 문제가 해결될 것 같은 내일을 그리워하며 '지금'에서 도망치려 한다. 하지만 〈미드나잇 인 파리〉는 말한다. 삶의 진실은 불안한 현실을 응시하고 자신의 민낯을 마주하는 바로 그 순간에 드러난다고.


진정한 황금시대는 시간을 거슬러 올라간 끝에 만나는 유토피아가 아니다. 그것은 환상의 마차를 보내고 홀로 빗속을 걷기를 선택한 자가 마주하는, 평범하고 자유로운 ‘오늘’ 그 자체다. 우리가 자신의 불완전한 실존을 긍정하며 현재라는 거리로 발을 내딛는 순간, 파리의 자정은 비로소 눈부신 아침으로 이어진다. 우리 역시 도망치기를 멈출 때 비로소 자기 삶의 진실한 문장을 써 내려가는 작가가 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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