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네마 천국>꺼내지 못한 장면들로 완성되는 삶

폴 리쾨르의 서사적 정체성으로 읽다

by 느리게걷는여자

주세페 토르나토레의 〈시네마 천국Cinema Paradiso〉은 한 영화감독이 고향에서의 아버지와 같았던 친구의 부고를 듣고 자신의 유년 시절을 회상하는 담담한 구조를 취하고 있다. 하지만 이 영화를 단순히 지나간 시절에 대한 향수로만 정의하기엔 마음 한구석에 남는 잔상이 너무도 깊다. 왜 우리는 알프레도가 남긴 낡은 필름 조각들을 보며 함께 마음의 진동을 느끼는 걸까. 나는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 폴 리쾨르의 ‘서사적 정체성’을 빌려와 내 안의 영사기를 다시 돌려보기로 했다.


1. 시칠리아의 태양, 종소리에 분절된 시간

시칠리아의 여름은 정적이다. 희게 타버린 광장의 석회암 벽면 위로 쏟아지는 뜨거운 태양 아래, 마을의 시간을 지배하는 것은 음악이 아니라 두 겹의 종소리이다. 성당의 종탑에서는 하루의 시간을 알리는 종이 울리고, 미사 중에는 신부의 손에 들린 작은 종이 의례의 순간을 가른다. 영화관 안에서도 예외는 없다. 스크린 위로 남녀의 입술이 포개어지려는 순간, 아델피오 신부의 손에서 흔들리던 그 작은 종은 곧 가위질로 이어진다.


영화에서 종소리는 단순히 도덕적 검열의 신호가 아니다. 그것은 이 작은 마을의 시간이 개인의 뜨거운 갈망이 아니라, 이미 정해진 질서 속에서만 반복되고 있음을 알리는 경계다. 리쾨르의 말처럼 시간은 그대로는 인간에게 경험되지 않는다. 시간은 오직 이야기될 때만 인간의 시간이 된다. 하지만 종이 울리는 이 세계에서 토토의 욕망은 이야기되지 못한 채 분절된다. 이 세계에서 인간은 자신의 이야기를 쓰는 작가가 아니라, 주어진 배역을 수행하는 배우에 머문다.


2. 새로운 정체성이 태동하는 영사실

닫힌 시간의 틈바구니를 비집고 들어오는 건 낡은 영사기의 빛줄기이다. 렌즈를 통과해 먼지 섞인 공기를 가르던 그 눈부신 통로. 어린 토토에게 영사기의 필름은 단순한 매체가 아니라 현실과 가능성을 잇는 탯줄과도 같아 보인다. 전쟁에 나간 아버지를 잃고 상실의 결핍이 생긴 아이에게, 필름은 삶이 반드시 하나의 선형적인 비극으로만 끝나지 않아도 된다는 암시이다.


이 비좁은 영사실에서 토토는 알프레도의 투박한 손마디를 보며 자란다. 화재로 알프레도가 시력을 잃고 토토가 그의 눈을 대신해 영사기를 돌리게 되었을 때, 두 사람의 운명은 비로소 하나의 서사로 묶인다. 평생 타인의 필름을 대신 돌려온 알프레도의 ‘동일성(idem)’의 삶은, 토토에게 세상을 ‘해석하는 눈’을 전해줌으로써 비로소 확장된다. 청소년기의 토토가 카메라를 들고 자신이 담고 싶은 장면을 찍기 시작한 것은, 타인의 이야기를 영사하는 삶에서 자신의 장면을 포착하는 주체로 나아가는 태동과 같다.


3. 미완의 첫사랑, 편집되지 못한 진실

토토에게 엘레나와의 첫사랑은 삶에서 가장 빛나던 필름이었지만, 동시에 가장 아프게 잘려 나간 장면이었다. 빗속에서 나누었던 간절한 키스는 영원할 것 같았으나, 결국 현실의 벽 속에서 미완의 상태로 남겨진다.

"절대 돌아오지 마라"는 알프레도의 간곡한 조언에 따라 토토는 더 큰 세계로 나가 성공한 감독이 되지만, 정작 그의 내면은 편집되지 않은 원본 필름처럼 어지럽게 널려 있었다.

화려한 성공 뒤에 숨은 공허함은 엘레나 이후 누구와도 진실한 관계를 맺지 못한 채 떠도는 상태에서 기인한다. 리쾨르의 관점에서 본다면, 이 사랑이 실패한 이유는 그들이 충분히 사랑하지 않아서가 아니다. 그 사랑이 아직 '자신의 서사'로 통합되지 못한 채 과거의 실종된 조각으로 남았기 때문이다. 사건은 겪었다고 해서 바로 의미가 되지 않는다. 고통스럽더라도 다시 불러와 현재의 시점에서 이야기로 엮일 때, 비로소 삶의 일부가 된다.


4. 30년의 단절, 그리고 폭파되는 기억

마을 사람들에게 ‘파라다이스’ 극장은 유일한 안식처이자 세계를 만나는 창이었다. 그곳은 모두가 같은 장면에서 웃고 울며 하나의 공통된 기억을 공유하던 공적 서사의 광장이자, 동시에 사회적 위계와 금기가 어둠 속으로 흩어지는 해방구이기도 했다. 높은 층에 앉은 권력자를 향해 하층민이 비릿한 야유를 던지고, 사제조차 어쩌지 못하는 날것의 욕망들이 객석에서 일렁거렸다. 토토에게 그곳은 알프레도의 유산과 엘레나와의 시선이 교차하던 사적인 성소였다.

30년의 단절 끝에 마주한 이 극장의 폭파는 그래서 중의적이다. 리쾨르에게 기억은 보존하는 유물이 아니라, 현재의 시점에서 다시 쓰는 책임이다. 낡은 극장이 굉음과 함께 사라진 폐허 위에서야 토토는 비로소 30년의 침묵을 깨고 과거와 조우한다. 토토의 공허했던 눈빛이 따뜻한 이해의 빛으로 번져가기 시작한다.


5. 알프레도의 선물, 서사적 정체성의 완성

알프레도가 남긴 마지막 선물, 검열로 잘려 나갔던 키스 장면들의 몽타주는 재서사의 눈부신 완성이다. 은막을 바라보며 토토가 흘리는 눈물은 격렬한 슬픔이 아니다. 누락되었던 삶이 이해되었을 때 찾아오는 조용한 안도다. 잘려 나갔던 조각들이 연결되는 순간, 토토는 과거의 향수에서 벗어나 현재를 살 수 있는 존재가 된다. 이것이 리쾨르가 말한 서사적 정체성의 순간이다.


6. 다시, 나의 이야기를 쓰기 위하여

우리는 그저 시간의 흐름을 통과하는 존재가 아니다. 기억은 과거에 고정된 것이 아니라, 현재의 시선에 따라 다시 배열되는 리듬이다. 영화 속 낡은 극장은 무너졌고 스크린은 암전되었지만, 잘려 나갔던 삶의 파편들은 이제 하나의 흐름이 되어 내 안에서 이어진다.

영사기는 멈추지 않았고, 내 속에는 여전히 이어 붙일 수 있는 조각들이 부유하고 있다. 이 필름을 어떤 장면 뒤에 잇게 될지는 아직 알 수 없다. 다만 다음 장면은, 아직 상영되지 않은 채 나만의 이야기가 되기를 조용히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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