색채가 없던 J씨의 순례
어릴적 나는 울면 혼났고, 소리치면 위협받았다.
엄마의 얼굴은 언제나 불안정한 날씨 같았고,
아빠의 인정은 성적표와 교환되는 것이었다.
그래서 나는 아주 일찍 배웠다.
사랑은 머무는 것이 아니라, 성취해야 유지되는 것이라는 사실을.
가정폭력이 벌어질 때마다 나는 투명해졌다.
어른들의 고함 속에서 아이의 공포는 아무도 보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나조차도 나를 보지 않기로 했다.
두려움을 버리고, 분노를 버리고, 슬픔을 버렸다.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행동해야 살아남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나는 감정을 느끼지 않는 사람이 되었다.
아니, 느끼지 않도록 훈련된 사람이 되었다.
사람들 사이에 있어도 늘 한 겹의 투명한 막이 있었고,
내가 그 안에 들어가도 되는 사람인지,
아니면 언제든 쫓겨날 수 있는 불청객인지 알 수 없었다.
이후 나는 늘 쓸모 있어지려고 애썼고,
유능해지려고 했고,
필요한 사람이 되려고 했다.
존재 자체로 사랑받는다는 개념은
이론으로만 알았을 뿐,
몸에 새겨진 생존회로는 조건부 사랑이었기 때문이다.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았을 때도 그 구조는 계속되었다.
남편 역시 나만큼 취약했다.
우리는 상황이 좋을 때는 잘 지냈고,
한쪽이 흔들리면 함께 무너졌다.
말투 하나에 상처받고,
표정 하나에 버려질 것처럼 반응했다.
우리는 서로를 사랑했지만,
서로를 안전기지로 사용하기에는
둘 다 너무 어린 신경계를 가지고 있었다.
그럼에도 우리는 15년을 함께 살았다.
싸우고, 멀어지고, 다시 돌아오며.
지금 와서야 알겠다.
그건 완벽해서가 아니라,
떠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는 것을.
서로를 견뎌주는 것도 사랑이라는 것을.
내 삶이 바뀐 건 아이가 태어나면서였다.
아이가 울 때 내 마음이 같이 아팠고,
아이가 웃을 때 나도 웃었다.
나는 내가 아이를 사랑해준다고 생각했는데,
나를 끝까지 사랑해준 건 언제나 아이였다.
내가 짜증을 내도, 지쳐도,
아이의 사랑은 철회되지 않았다.
그 경험이 내 안의 얼어붙은 부분을 녹였다.
조건 없는 사랑이란
책에나 나와있는 관념이 아니라
인간의 본성에 원래 들어 있다는 사실을
나는 그제야 몸으로 알았다.
심리학 책에서 읽었던 문장들이
뒤늦게 살아났다.
불안, 수치심, 죄책감은
내면아이가 보내는 신호라는 말.
그동안 나는 그 신호를
억누르거나 무시하거나 생산성으로 덮어버렸다.
그러나 내 마음에서
도망칠 수 있는 방법은 없었다.
회복은
고치는 게 아니라
만나는 것이었다.
조건을 달지 않고,
성과를 요구하지 않고,
“그래도 괜찮다”고 말해주는 태도였다.
지금 나는 여전히 가끔
나 자신에게 가혹해진다.
불안하면 더 잘하려 하고,
쓸모로 나를 증명하려 한다.
하지만 이제 나는 안다.
그건 내가 잘못해서가 아니라,
한때 그렇게 살아남아야 했기 때문이라는 것을.
이제는 조금씩
그 사슬이 느슨해지고 있다.
남편과의 관계에서도
말투가 위협으로 들릴 때
“지금 우리가 무서워졌구나”라고 말할 수 있게 되었고,
싸운 뒤에도
“우리는 흔들렸지만 끝나지 않았다”고 확인할 수 있게 되었다.
이게 바로 안전감이다.
불완전해도 함께 머물 수 있다는 믿음.
조건부로 사랑받던 아이는
이제 천천히
존재만으로도 환영받는 사람이 되어 가고 있다.
그 길은 빠르지 않지만,
되돌릴 수는 없다.
나는 더 이상 투명인간이 아니다.
마침내
내가 나를 보고 있기 때문이다.
***
<색채가 없던 J씨의 순례>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 속 쓰쿠루가 자신의 이름에만 색깔이 없다는 고독을 안고 과거의 상처를 찾아 여행을 떠났듯, 나 역시 나의 상처를 정면으로 응시하는 순례를 시작했다는 의미이다.
이 소제목은 나를 객관화하는 방패이자, 동시에 누구나 투영될 수 있는 열린 문이다. 'J씨'라고 스스로를 부르는 순간, 나는 피해자의 위치에서 벗어나 자신의 삶을 기록하는 작가이자 관찰자가 된다. 나의 아픔은 이제 수치의 비밀이 아니라, 순례자가 거쳐야 할 고행의 여정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