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 선택받지 못한 것들은 정말 미완성일까?
무명작가로 매주 한두 편의 칼럼을 올리며 출판사의 연락을 기다리는 과정은, 아직 관객은 없지만 이미 울림을 시험하고 있는 무대 위의 조율과 같다. 관객은 없고, 박수도 없지만, 나는 문장이 닿을 자리를 상상하며 매번 호흡을 고른다.
영화 <비긴 어게인 Begin Again>에서 그레타가 소란스러운 바 한가운데서 고개를 숙인 채 노래할 때, 나는 장면 위로 나의 시간을 포개어 본다. 세상의 관심과는 무관하게, 나만의 연주를 멈추지 않으려 애쓰던 시간들. 이 영화는 위로를 건네는 대신 질문을 던진다. 아무도 귀 기울이지 않는 시간에 연주를 멈추지 않는다는 건, 소리가 닿기 전부터 이미 누군가를 향해 있다는 뜻일까.
1. 실존의 위기: 이미 평가된 존재
실존주의 철학자 사르트르는 "타인은 지옥이다"라고 말했다. 우리가 타인의 시선과 사회적 기준에 자신을 맞추려 할 때, 우리는 '나'라는 본질을 잃고 박제된 존재가 되기 때문이다. 영화 속 그레타와 댄은 각기 다른 방식으로 그 지옥의 끝에 서 있다. 그레타는 자신의 음악적 색깔을 버린 적이 없다. 다만 스타가 된 연인을 위해 자신의 꿈을 잠시 유보한 채, 그의 작업실에서 커피를 사 나르며 '파트너'라는 이름의 조연으로 머물렀을 뿐이다.
자신의 빛나는 재능을 누군가의 배경으로 소모하며 점점 주체성을 잃어갔던 그레타, 그리고 상업적 성공이라는 냉정한 수치 앞에서 자신이 세운 회사에서조차 밀려난 프로듀서 댄. 이 둘의 만남은 우연으로 시작되지만, 실은 각자의 자리에서 더 이상 버틸 수 없게 된 두 사람이 같은 질문 앞에 서게 된 순간이다.
영화의 대표곡 〈길 잃은 별Lost Stars〉이 묻듯, 그들이 헤매고 있었던 것은 재능의 부족이 아니라 방향의 상실이었다. 더 이상 누군가의 조력자나 시스템의 부속품으로 머물 수 없게 되었을 때, 그들은 비로소 자신만의 ‘진짜 연주’를 시작할 채비를 마친다. 이는 타자가 설계한 궤도를 벗어나 오직 나만의 속도로 빛나는 법을 다시 배우는 일—'실존의 멜로디'를 찾아가는 고통스럽고도 찬란한 첫걸음이 된다.
2. 관계의 공명: 상상이 실현되는 뉴욕의 거리
사랑을 잃고 실의에 빠진 그레타의 내뱉듯 읊조리는 음악을 처음 마주했을 때, 댄은 소리를 평가하지 않는다. 그는 듣는 대신 상상한다. 기타의 빈 공간 사이로 드럼이 박자를 세우고, 현악이 숨처럼 깔리며, 도시의 소음이 리듬이 되는 찰나를 말이다. 댄의 상상은 혼자만의 공상으로 끝나지 않고, 그레타를 설득해 녹음실 밖 ‘진짜 세상’으로 끌어내는 동력이 된다.
이 무모한 프로젝트에 생명력을 불어넣은 것은 각자의 고립된 섬에서 자기만의 소리를 내던 뮤지션들의 합류다. 고리타분한 연주에 싫증 난 채 댄의 호출을 기다렸다는 듯 악기를 챙겨 나온 재즈 피아니스트, 청중 없는 거리에서 묵묵히 기타 줄을 퉁기며 자신만의 선율을 지켜내던 길거리 연주자 스티브, 그리고 자신의 개성을 지운 채 고전 양식만을 반복하며 갈증을 느끼던 음악 전공생 첼리스트와 바이올리니스트까지. 이들은 댄의 제안에 기꺼이 악기를 들고 뉴욕의 거리라는 거대한 캔버스로 모여든다.
골목에서 시작된 이들의 합주는, 음악을 듣다 어느새 그 안으로 스며든 아이들의 목소리와 함께 자라났다. 의도하지 않았기에 더 생생했던 그 순간들은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이 내려다보이는 옥상으로 이어지며, 단순한 녹음을 넘어선 경험이 된다. 조화롭되 자유로운 저마다의 음색은 그레타의 담백한 멜로디 위에서 숨을 얻고, 서로의 눈을 맞추며 빚어낸 즉흥적인 그루브는 댄의 상상을 실재하는 전율로 끌어올린다.
댄의 안목과 그레타의 진심, 그리고 뮤지션들이 보탠 저마다의 음색은 뉴욕의 공기와 부딪히며 비로소 ‘하나의 앨범’이라는 형체를 얻는다. 이 장면은 묻는다. 선율은 연주자의 손을 떠나는 순간 끝나는가, 아니면 타인의 마음에 닿아 다시 울릴 때 비로소 시작되는가?
3. Y자 잭의 인문학: 고립된 두 세계가 주파수를 맞추는 법
이 영화에서 가장 상징적인 소품은 하나의 플레이어에 두 개의 이어폰을 연결하는 ‘Y자 잭’이다. 댄과 그레타는 이 잭을 나눠 끼고 뉴욕의 밤거리를 걷는다. 댄은 이어폰 너머로 흐르는 선율을 느끼며 말한다.
“음악은 평범한 순간조차 의미 있는 진주로 바꿔 놓는다.”
이때 Y자 잭은 단순히 창작자와 수용자의 관계를 상징하는 장치를 넘어선다. 그것은 서로 다른 삶의 궤적을 그려온 두 개의 세계가 하나의 리듬 위에서 잠시 주파수를 맞추는 방식이다. 잭이 연결되는 순간, 각자의 고독에 고립돼 있던 두 사람은 상대의 내밀한 세계, 즉 플레이리스트로 조심스럽게 초대된다. 같은 음악을 듣고 있지만 그레타는 자신의 상처를 추스르고, 댄은 새로운 가능성을 떠올린다. 해석은 다르지만, 그들이 공유하는 것은 ‘함께 진동하고 있다’는 감각이다.
작가가 쓴 글이 Y자 잭의 한쪽 끝이라면, 독자가 자신의 삶이라는 이어폰을 꽂는 순간 두 세계의 연결은 완성된다. 댄이 그레타의 플레이리스트를 통해 그녀의 영혼을 발견하듯, 독자는 작가의 문장을 통해 평범했던 일상을 자신의 삶으로 다시 번역한다. 이제 글은 작가의 독백에 머무르지 않는다. Y자 잭을 사이에 두고 건네는,
“이 문장은 당신의 삶에서는 어떤 파장으로 울리고 있나요?”라는 슬며시 열어둔 초대다.
4. 공명을 기다리는 마음
영화의 마지막, 그레타는 거대 음반사의 계약 제안을 거절하고 자신의 앨범을 단돈 1달러에 인터넷으로 배포한다. 이는 음악이 숫자로 환산되기보다, 누군가의 일상에 직접 닿기를 바라는 주체적인 선택이다. 나는 아직 그레타만큼 초연하지 못하다. 매주 칼럼을 올리며 출판사의 연락을 기다리고, 내 글이 시스템의 인정을 받아 더 넓은 세계로 퍼져나가기를 여전히 바란다.
하지만 그레타의 1달러짜리 결단이 내게 던지는 질문은 ‘거절’ 그 자체가 아니다. 그것은 '내 글의 가치를 결정하는 주권이 어디에 있는가'라는 물음이다. 선택을 기다리는 긴 시간 속에서도, 내 문장이 지금 이 글을 읽는 당신의 마음 한구석에서 작은 파동을 일으키고 있다면, 예술은 이미 작동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5. 당신의 '마음이라는 무대' 위에서
나는 여전히 나의 ‘댄’을 기다리며 매주 문장을 고른다. 하지만 이제는 안다. 나의 손끝에서 떠난 문장들이 이름 모를 독자의 일상과 만나 저마다의 리듬으로 연주되고 있다는 사실을 말이다. 작가로서 나의 소명은 완벽한 마침표를 찍는 것이 아니라, 당신의 마음이라는 악기가 기꺼이 반응할 수 있는 ‘진실한 첫 소절’을 건네는 일이다. 오늘 나의 이 글이 당신의 가슴 속에서 당신만의 선율로 다시 연주되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