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인생의 놀이터는 지금 어떤 모습인가?
런던의 안개 속, 대기 상태의 삶
런던의 아침, 짙은 안개 사이로 비슷한 양복과 똑같은 볼러 햇을 쓴 사내들이 줄지어 기차에 오른다. 영화 〈리빙 Living: 어떤 인생〉은 이 무채색 행렬의 앞줄에 섞여 있던 한 노신사, 윌리엄스의 이야기다.
그는 시청 공무원으로서 매일 같은 시간, 같은 책상, 같은 서류를 처리하며 살아왔다. 정확히 말하면 ‘살아왔다’기보다 ‘존재를 연기해왔다’는 표현이 더 어울린다. 그의 하루에는 기쁨도 슬픔도 없다. 감정의 결이 삭제된 삶. 영화 속 대사는 그의 인생을 이보다 더 정확히 요약할 수 없을 것처럼 들린다
“놀이터 구석에서 아무하고도 어울리지 못하고,
기쁘지도 슬프지도 않은 채, 그저 엄마가 오기만을 기다리던 아이.”
그 아이는 끝내 성장하지 못한 채 노인이 되었고, 그의 삶은 늘 대기 상태에 머물러 있었다. 시스템의 부속품으로 서서히 마모되어 가던 그에게 내려진 암 선고는, 역설적이게도 그를 비로소 ‘살아 있는 인간’으로 되돌려 놓는 기폭제가 된다.
생의 끝에서 마주한 생의 감각
시한부 선고를 받은 뒤 윌리엄스가 선택한 것은 평생을 지탱해온 루틴과의 결별이었다. 매일 아침 오르던 기차에 몸을 싣지 않고, 서류 더미가 기다리는 책상 대신 낮의 온기가 감도는 카페에 앉는 것. 그것은 단순한 방황이 아니라 생애 처음으로 시도한 의도적인 '일탈'이었다. 그 낯선 자유의 길목에서 만난 극작가는 윌리엄스를 화려한 조명과 술, 자극적인 소음이 가득한 밤의 세계로 이끈다.
그곳에서 건네받은 '쾌락과 관능'은 죽음이라는 거대한 공포를 잠시 잊게 해주는 달콤한 마취제였다. 하지만 번쩍이는 네온사인 아래서 들이켠 술잔은 비어버린 영혼을 채우기엔 지나치게 투명했고, 환락의 끝에는 여전히 서늘한 허무만이 기다리고 있었다. 죽음을 관념적인 유희로 대하던 극작가는 지독한 불면증에 시달리고 있었다. 깨어 있지도, 잠들지도 못한 채 밤을 배회하는 그가 권한 것은 결국 '잠시 잊는 법'이었을 뿐, '다시 눈뜨는 법'은 아니었다.
반면 전 여직원 마거릿과의 만남은 그에게 전혀 다른 차원의 빛을 비춘다. 낮의 카페, 햇살 아래 앉아 있는 그녀는 존재 자체로 '살아 있음'을 증명하는 이정표였다. 윌리엄스가 그녀의 활달한 움직임과 사소한 농담에 끌렸던 것은 단순한 호감 때문이 아니었다. 그것은 평생을 정체된 공무원으로 살아오며 잊고 지냈던, 생생한 시간의 맥박을 다시 감각한 순간에 가까웠다.
마거릿은 과거 그에게 “좀비”라는 별명을 붙였었다고 장난스럽게 고백한다. 잔인할 만큼 투명한 그 말 앞에서, 윌리엄스는 비로소 거울 속 자신의 껍데기를 직시한다. 밤의 쾌락이 죽음을 잠시 가려주는 짙은 장막이었다면, 마거릿의 생동감은 죽음 앞에 선 그가 왜 남은 시간을 ‘나답게’ 써야 하는지를 일깨워주는 부드러운 마중물이었다. 그는 결심한다. 인생이라는 놀이터 앞에서 하염없이 '엄마'를 기다리던 아이의 시간과 작별하고, 비로소 스스로 그 안으로 들어가기로.
방치된 내면이 '놀이터'가 될 때
이 영화의 심장은 ‘놀이터’라는 공간에 있다. 윌리엄스가 마지막으로 매달린 일은 도심의 허름한 폐공간을 놀이터로 바꾸는 일이었다. 흥미로운 점은 그가 선택한 그 장소가 마치 그의 황폐해진 내면을 그대로 옮겨 놓은 듯 보인다는 것이다. 오랫동안 인적이 끊기고, 형체조차 가늠하기 어려운 낡은 잔해만 남아 있던 공터는 평생 감정을 억눌러 온 채 스스로를 방치해 온 윌리엄스의 영혼과 닮아 있었다.
이전의 그였다면 그는 적당한 규정을 둘러대며 서류를 다른 부서로 넘기거나 방치했을 것이다. 그것은 망가진 내면을 마주하지 않고 외면하는, 그가 평생 익숙해 있던 방식이었다. 그러나 이제 그는 직접 진흙탕 속으로 발을 내딛는다. 타 부서의 책임 전가와 냉대 속에서도 그는 묵묵히 관계자들의 눈을 보고 설득하며 현장을 지킨다.
그가 짓고자 한 것은 단지 아이들을 위한 공간이 아니었다. 그것은 서류 더미 뒤에 숨어 외면해 왔던 자신의 삶을, 비로소 현실의 무게로 감당해 내는 구체적인 현장이었다. 방치된 땅을 정화하고 아이들의 웃음소리로 채우려는 그의 사투는, 곧 죽어가는 자신의 내면을 비로소 돌보고 치유하려는 성스러운 의식이었다.
같은 듯 다른 모자
윌리엄스가 '모자를 바꿨다'는 사실은 이 영화의 미묘한 전환점이다. 그는 극작가의 권유로 타인이 쓰던 다른 볼러 햇(Bowler hat)을 흥정해서 산다. 겉보기엔 이전의 것과 크게 다를 바 없는, 여전히 보수적인 영국 신사의 모자다. 비슷한 모자를 바꿔 쓴 행위는 그가 자신의 운명을 대하는 태도에 미세한 균열이 생겼음을 상징한다. 타인이 씌워준 관습의 무게가 아닌 스스로 선택하고 흥정하여 얻은 '자신만의 무게'를 머리 위에 얹겠다는 작은 선언. 그는 이제 그 모자를 쓰고 예전처럼 서류 더미 속에 숨지 않는다.
짧은 생의 찬가
"화를 내며 보내기에는 우리의 인생은 얼마나 짧은가!"
스토아 철학자 세네카의 말이며, 영화에도 잠깐 등장하는 대사이다. 윌리엄스는 이 철학적 통찰을 온몸으로 보여주며, 분노하거나 절망하는 대신 놀이터의 완공을 위해 묵묵히 그네의 자리를 살핀다.
어느덧 계절은 바뀌고 함박눈이 내리는 밤, 완공된 놀이터 그네에 앉아 그가 부르던 민요 가사는 심오한 울림을 남긴다. "오래전, 아주 먼 옛날, 로완(Rowan) 나무 아래서..." 생명과 보호를 상징하는 로완 나무 아래의 노래는, 그가 평생 기다려온 '엄마'의 품과 같은 평온을 선사한다. 놀이터 시설 관리자가 목격한 그의 마지막 미소는, 평생 놀이터 주변을 맴돌던 아이가 드디어 그네의 주인공이 되어 누리던 가장 큰 행복의 순간을 보여준다.
눈 덮인 그네 위에 남겨진 윌리엄스의 자취를 보며 문득 나의 책상을 살핀다. 우리는 얼마나 오랫동안 ‘나중에’라는 서류를 쌓아두며, 삶의 입구에서 기다리기만 해왔을까.
이제 내 인생의 놀이터 안으로, 나는 들어갈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