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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느리게걷는여자 Nov 30. 2020

한병철 <에로스의 종말>로 영화 <공기인형> 읽기

피그말리온은 정말로 사랑했을까?

피그말리온은 정말로 사랑했을까?

-한병철 <에로스의 종말>로 영화 <공기인형>


신화의 피그말리온(Pygmalion)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피그말리온은 키프로스 섬에 사는 솜씨 빼어난 조각가였다. 그는 어쩐 일인지 실제 여자는 멀리하며 조각하는 데에만 몰두하였다. 어느 날 백설처럼 흰 상아로 실물과 같은 크기의 여인을 조각하였다. 그 조각상은 마치 살아있는 여인처럼 보일 정도로 정교하고 아름다웠다. 이 완벽한 작품을 날마다 흡족한 눈으로 감상하던 피그말리온은 자신의 작품인 상아처녀를 사랑하게 되었다. 그는 실제의 연인처럼 하루에도 몇 번씩 상아처녀를 어루만지고 예쁜 옷을 입히기 까지 했다. 집을 들고 날 때는 입맞춤을 하기도 했다.

  피그말리온의 순정을 어여삐 여긴 아프로디테는 ‘저 상아처녀를 아내로 주소서’하며 제물을 바치고 여신을 경배하던 그의 소원을 들어주었다. 집으로 돌아간 피그말리온은 늘 하듯이 상아처녀에게 입을 맞추었다. 그러자 상아처녀의 입술에는 온기가 감돌고 몸은 따뜻하고 말랑말랑하게 변하였다. 이렇게 해서 상아처녀는 인간이 되었다.


현대판 피그말리온, 영화『공기인형(Air Doll, 2009)』

  쓸쓸한 도시에 살고 있는 한 남자가 있다. 그는 인형과 함께 사는 남자이다. 인형은 5980엔을 주고 산 ‘캔디’라는 구형 모델로 실물크기의 공기인형이다. 히데오는 공기인형을 ‘노조미’라고 부른다. 그는 식당 종업원 일이 끝나면 집으로 돌아와 저녁을 먹으며 노조미에게 소소한 하루 일과를 이야기 한다. 또한 한침대에서 잠이 들고 함께 목욕을 하며 때때로 산책을 하기도 한다. 집을 나서거나 돌아올 때면 언제나 다정하게 인사를 한다. 노조미가 ‘성욕 해소용 인형’이라는 점만 제외하면 여느 부부나 연인의 모습과 다르지 않다.


“내게 마음이 생겨버렸습니다. 내게 있으면 안 되는 마음이 생겨버렸습니다.”(영화 중)


  어느 날 노조미에게 생명의 바람이 불어든다. 갑자기 사람과 같이 감정을 갖고 자유롭게 말하고 행동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예쁘다’는 감탄으로 호기심 어린 눈으로 세상을 탐색하던 노조미는 우연히 DVD 가게 앞을 지나다가 점원 ‘준이치’를 보고 호감을 느낀다. 함께 살고 있는 주인 히데오에게는 마음이 생긴 것을 비밀로 한 채 준이치가 일하는 가게에서 아르바이트를 시작하며 세상과 만난다. 꿈꾸고, 사랑하고, 감정을 갖게 된 노조미는 ‘마음이 있다는 건 아픈 일’이라는 것 또한 깨닫는다. 준이치에게 사랑을 느낄수록 더 이상 주인의 인형 노릇을 할 수 없던 노조미는 집안에서 모습을 감추고 숨어 지낸다.


  노조미의 ‘실종’에도 불구하고 그저 가족 중 누군가 낡은 인형을 버렸을 뿐이라고 생각한 히데오는 ‘새 인형’을 구입한다. 긴 머리의 신형 모델 인형을 똑같이 ‘노조미’라고 부르며 이야기하고 잠자리에 들고 일상을 함께 한다. 그러던 중 ‘구형 인형’ 노조미가 히데오에게 모습을 드러내고 ‘마음’이 생겼다는 사실을 알린다.


“있잖아, 부탁이 있어. 예전처럼 인형으로 돌아가 주면 안 돼?”(히데오)

“예전처럼?”(노조미)

“그냥 평범한 인형으로......안될까?”(히데오)

“마음 같은 거 없는 편이 좋다는 거야?”(노조미)

“응, 성가시잖아. 애초에 성가신 게 싫어서 널 데려온 거야.”(히데오)


  이렇게 해서 ‘속이 텅 비어 있는 사람’들의 이야기인 ‘현대판 피그말리온’은 해피엔딩으로 끝맺지 못한다. 그리고 영화는 이야기 한다. 속이 텅 비어 있다면, 죽을 때 타지 않는 쓰레기인 ‘플라스틱 인형’이나 타는 쓰레기인 ‘살점덩어리 인간’이나 본질적으로는 같다고 말이다.


공허한 현대인의 표상, 욕망할 뿐인 피그말리온

  지그문트 바우만은 소비주의와 더불어 물질적 쾌락이 행복이라고 믿는 현대인들은 상품에서 얻는 쾌락이 감소하게 되면, 또 다른 쾌락을 찾아 소비하게 되고, 사물과 맺게 되는 이러한 일방적이고 비대칭적인 관계가 인간관계에 까지 주입된다고 주장하였다. 그리하여 타인에 대해 오직 약속된 쾌락이나 위안만을 얻길 바라기에 타자를 욕망할 뿐 사랑의 불능자가 되는 ‘나르시시스트’가 된다.


  ‘내 속엔 내가 너무도 많아 당신의 쉴 곳 없네(가시나무)’

라는 노랫말처럼 자아의 초점이 오직 자신의 욕망에 갇혀 있기 때문에 타인을 위한 빈자리, 즉 타인을 향한 관심과 사랑이 부재한 상태가 되는 것이다. 쉽게 말해 나르시시스트는 ‘나와 같은 자유의지를 지니고 있지만 나와는 다른 삶의 방식을 지닌 타인’을 내 속에 받아들이기 위한 불편과 괴로움을 견디지 못한다.


  영화에서 노조미를 단지 쾌락과 위안을 주는 사물로서 애착할 뿐이던 히데오는 노조미에게 마음이 생기자 ‘성가시다’는 표현으로 그녀의 존재를 부정한다. 나르시시스트에게 타인은 인간이 아닌 사물로서 경험된다. 자신의 결핍을 메우기 위한 ‘수단’으로 관계할 뿐이다. 마치 ‘공기인형’을 욕망할 뿐 사랑하지 못하는 히데오처럼. 속이 텅 비어있는 존재는 히데오 일까, 노조미 일까?


네크로필리아(necro-philia)

  시체-애호증을 뜻하는 네크로필리아(necro-philia)는 정신병리학적으로 시체에 대한 성적 도착을 의미한다. 에리히 프롬은 네크로필리아의 의미를 ‘죽음을 사랑하는 성향’으로 확장시켜 현대인들의 물질주의를 표상하는 개념으로 사용하였다. 생명의 본질은 자유에 있다. 그 본성에 있어서 무질서한 것이고 지배할 수 없는 특징이 있다. 이러한 생명보다 기계처럼 마음대로 조작할 수 있고 매끈하고 편리한 인공물에 애착하는 것이 바로 ‘네크로필리아’이다. 실제의 여자들은 멀리하고 자신이 만들어 낸 인공물인 ‘상아처녀’를 열망하던 피그말리온은 사실 ‘네크로필리아’가 아니었을까?


“삶(생명)의 특징은 구성적 기능적 방식으로 성장하는 데 있지만, 죽음을 사랑하는 사람은 성장하지 않는 모든 것, 기계적인 모든 것을 사랑한다. 죽음을 사랑하는 사람은 유기적인 것을 무기적인 것으로 바꿔 놓고, 마치 모든 생명 있는 사람들이 사물이기라도 한 것처럼 삶(생명)에 기계적으로 접근하려는 욕망에 사로잡힌다. 모든 생명의 과정, 감정 및 사고는 사물로 바뀐다. …그는 지배를 사랑하고 지배하는 행위에 있어서 삶(생명)을 말살한다. 그는 삶(생명)을 몹시 무서워한다. 삶(생명)은 그 본성에 있어서 무질서한 것이고 지배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에리히 프롬, 『인간의 마음(The Heart of Man)』


성애와 포르노

  영화에서는 텅 빈 표정으로 성관계에 응하는 노조미의 표정이 비춰진다. 성애性愛는 사랑愛의 육체적性 표현이다. 인격과 인격의 교감 없이 노골적으로 육체만을 부각시킨 과잉 이미지를 포르노라고 한다. 에로스는 두 실존적 존재의 만남을 전제한다. 내가 소중하듯 타자 또한 소중하다는 것을 전제로 하는 만남이다. 반면 포르노에는 만남이 없다. 포르노적 관계 안에서 타자는 섹스 도구와 같은 사물에 불과하다. 자위적 요소뿐이니 흥분 뒤에는 공허만이 남는다. 공허를 채우기 위해 ‘자폐적 인간’-타자 없는 나르시시스트는 다시 ‘흥분 거리’를 찾는다. 자아의 흥분을 위해 사물을 구매한다는 점에서 ‘소비’는 포르노적이다.


  어느 시대나 포르노는 있었고, 포르노 자체는 타락이 아니다. 그러나 삶의 모든 영역이 포르노화 되는 것은 위험한 일이다. 자본주의는 모든 쾌락을 긍정한다. 한 번에 수천 명을 죽일 수 있는 대량살상 무기마저 돈이 된다면 긍정한다. 욕망이 무분별하게 긍정되고 있다는 데에 그 위험이 도사리고 있다. 따라서 그 어느 때보다도 ‘욕망의 성찰’이 필요한 시대이다.


  인간에게는 누구나 타인과 연결되고자 하는 관계의 욕구를 지니고 있다. 연결 되지 못했을 때의 ‘단절감’이 ‘속이 텅 빈’것과 같은 공허와 외로움을 불러일으킨다. 과도한 욕망을 쫓느라 삶을 소진시키는 대신 사랑을 위한 '여백'을 마련하는 것이 필요하다. 나를 위한 빈자리, 나아가 타인을 위한 빈자리에서 너와 나의 연결이 있다. 바로 그 지점에 욕망이 아닌 사랑은 움튼다.


정말로 사랑하기 위하, "내 안에 너 있다"

  사랑에 빠지는데 걸리는 물리적 시간은 0.2초. 에로스는 왜 하필 화살을 던졌을까? 화살은 치명적인 흔적을 남긴다. 사랑만큼 인간을 행복하게 하는 경험이 없듯 사랑만큼 인간을 고통스럽게 하는 경험 또한 없다. 사랑은 인간 본연의 ‘자기중심성’이 흔들리고 그 균열 사이로 타인를 받아들이는 과정이다. 나와는 다른 역사와 정체성을 지닌 고유한 인격체를 내 안에 품는 과정이다.


  그래서 사랑에는 긍정성이라고 할 수 있는 ‘따뜻함, 친밀함, 안락함’만이 있는 것이 아니다. 자유를 전제로 하는 서로 다른 생각과 욕구를 존중해주는 만남이기에 부정성이라고 할 수 있는 ‘갈등’과 ‘예측불가능성’ 또한 불가피하다. 정말로 사랑하고 있다면 부정성인 불편과 아픔을 기꺼이 허락하게 된다.


  따라서 사랑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너와 나의 만남을 지속하기 위해 노력하는 과정이자 이를 통해 두 실존의 성숙을 경험하게 한다. 사랑은 긍정성과 부정성의 변증법적 과정 안에 있다. 변증법(dialectic)은 ‘대화하기’라는 의미를 지닌 그리스어 동사 ‘dialektike’에서 유래한다. 독백은 사랑이 아니다. 사랑은 너와 나의 대화로 만들어 가는 서사이다. 과연 피그말리온은 정말로 사랑했을까?

***합변(합이 변을 만나면 열린 조직으로 발전하며 느슨한 연대가 이루어진다)-독서모임인 룹압할리2의 완성글입니다.


***인문매거진 <바닥>, 2021 봄호 게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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