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너진 자리에서 만난 온유함

by 율리

탄자니아와 잠비아를 잇는 타자라TAZARA 열차를 탔었습니다. 약 1,860km 길이의 아프리카 동부 철도로, 2박 3일 동안 느긋한 속도로 아프리카의 심장을 횡단하게 되죠. 국립공원 내부를 통과하는 열차인데, 가장 큰 매력은 객실 창문에서 아프리카 야생동물을 볼 수 있다는 겁니다.


현지인들의 주요 이동 수단이다 보니, 여행객과 현지인이 자연스럽게 섞이게 되는 식당 칸에서 매력적인 아프리카 청년을 만났습니다. 자신을 변호사라고 소개한 청년과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아프리카에 대해서, 서로의 삶에 대해서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담소를 나눴어요.


그러던 중 제가 지니고 있던 카메라를 보고 가격이 얼마냐고 물었어요. 그저 순수한 호기심이라 생각하며 순수히 대답했습니다. 하지만 그 호기심 속에 무엇이 감춰져 있었는지, 저는 그때까지 꿈에도 몰랐습니다.


이후 잠비아에서 탄자니아로 국경을 넘어갈 때, 기차는 잠시 멈추고 여권을 검사하는 검문 요원이 소란스럽게 올라탔습니다. 그 정신없는 틈을 타 변호사 친구는 흔적도 없이 사라졌고, 아프리카 여행의 긴 추억이 담겼던 카메라도 함께 자취를 감췄어요. 그 남자가 네 카메라를 들고 내린 것 같다는 누군가의 조심스러운 말 한마디에 제 가슴은 철렁 내려앉았습니다.


카메라를 잃어버린 것보다 저를 더 아프게 한 건 ‘사람을 믿은 대가’가 배신이었다는 거였습니다. 여행 중 처음으로 도난을 경험했던지라 당황스러움과 동시에 마음이 위축됐었어요. 도망치는 방으로 들어와 허탈함, 배신감, 두려움, 카메라에 담긴 추억의 상실 등 온갖 감정의 소용돌이 속에서 밖으로 나가지 않고 마음을 걸어 잠 갔습니다.


당시 4인실 침대칸이었는데, 저 외에 3명의 덩치 큰 흑인 아저씨가 앉아 있었습니다. 커다란 덩치와 무서운 인상에 별다른 말을 섞지 않았고, 눈길 두는 것도 조금 무서웠었어요. 그저 경계해야 할 낯선 사람이었을 뿐입니다.


그렇게 두려움 속에 갇혀 떨고 있던 제게 먼저 손을 내민 건, 제가 그토록 경계했던 그 아저씨들이었습니다. 표정이 좋지 않고 가만히만 있어서 그런지 무슨 일이 있냐고 물어봐주었어요.


카메라를 도둑맞았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런데 제 예상과는 전혀 다른 반응이 돌아왔습니다. 그분들은 마치 자기 일처럼 안타까워하며 열차 경찰을 불러 상황을 설명하며 대신 신고해 주었고, 낙담한 저를 위로하며 밥 먹고 힘을 내라며 당신들의 낡은 도시락 통을 꺼내셨습니다. “힘내라. 우리랑 같이 밥 먹자.”


도시락 뚜껑이 열리는 순간, 저는 말문이 막혔습니다. 그곳엔 반찬 하나 없이 덩그러니 놓인 하얀 쌀밥뿐이었거든요. 나중에 알게 되었습니다. 그분들은 2박 3일의 긴 여정 동안 식당 칸에 갈 형편이 되지 않아, 오로지 이 쌀밥 도시락 하나로 버티고 계셨다는 것을요. 자신들의 한 끼조차 위태로운 분들이, 카메라를 잃고 낙담한 이방인을 위해 그토록 소중한 당신들의 양식을 기꺼이 내어주신 겁니다.


그 맹물 같은 밥알을 씹는데 자꾸만 목이 메어왔습니다. 그동안 여기저기 여행을 다니며 꽤 넓은 세상을 보고 있다고 자부해 왔었어요. 하지만 진짜 가난한 사람은 카메라를 잃은 제가 아니라, 사람의 진심을 보지 못하고 겉모습으로만 다른 사람을 재단했던 제 영혼이었습니다. 세련된 변호사는 제 믿음을 앗아갔지만, 이름 모를 거구의 아저씨들은 제게 무너진 세상을 다시 세울 힘을 주셨습니다.


덕분에 배웠습니다. 인생에서 가장 아름다운 풍경은 카메라 렌즈가 아니라, 사람의 선의를 통해 보게 되는 마음의 풍경이라는 것을. 저는 그날, 카메라 렌즈라는 좁은 프레임을 통해서는 볼 수 없었던 진짜 사람을 만났습니다.


밤늦은 시간 목적지에 도착했을 때도 그분들은 역 주변이 위험하다며 정말 조심하고 또 조심해야 한다며 몇 번이나 신신당부를 했는지 모릅니다.


역에서 내릴 때 자기들이랑 같이 내려야 하고, 역 밖에서 헤어지며 못내 저를 또다시 걱정해 주며, 자기들 이메일을 알려주었습니다. “무사히 숙소에 도착하면 이메일을 보내주길 바란다. 네가 무사히 도착하기를 바라고 있겠다”며. 결국 카메라라는 물건은 결국 찾지 못했지만, 저는 물건보다 훨씬 귀한 ‘사람의 온도’를 얻었습니다.


카메라를 잃어버린 덕분에 오히려 사람을 깊게 만났고, 삶이 건네는 뜻밖의 선물을 발견했습니다. 그래서 이제는 무언가를 잃어버리는 것이 예전만큼 두렵지 않습니다. 자신의 전부였을 도시락을 기꺼이 내어준 그들의 온유함을 저 또한 배우고 싶어 졌거든요.


상실은 무언가를 뺏었기는 과정이 아니라, 때로는 더 귀한 것을 채우기 위해 자리를 비워내는 과정이라는 것을 이제는 믿습니다. 닫힌 마음을 열었을 때 비로소 살아있는 여행이 시작되었던 그날처럼, 우리의 삶이 예기치 못한 순간마다 다정한 선물을 숨겨두고 있음을 잊지 않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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