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처받지 않기로 결심한 날부터, 당신의 세상은 조금씩 무채색으로 변해갔을지도 모릅니다. 아픔을 밀어내기 위해 촘촘히 쌓아 올린 성벽은 당신을 보호해 주었지만, 동시에 당신을 지독한 고립 속에 가두었어요. 누구에게도 곁을 내어주지 않는 안전함 속에서 우리는 비로소 깨닫습니다. 상처받지 않겠다는 선언은 곧, 누구와도 깊이 연결되지 않겠다는 고요한 절망의 선언과 같았음을요. 진정으로 누군가와 가까워진다는 건, 실은 그 사람이 내게 상처 줄 수 있는 거리에 들어오는 것을 기꺼이 허용하는 무방비한 용기에서 시작됩니다.
그 거리 안에서는 상대가 무심코 던진 말 한마디조차 내 마음의 가장 연약한 곳에 가닿기 마련입니다. 상처받을 위험을 무릅쓰고서라도 기꺼이 그 거리를 열어주는 것. 어쩌면 사랑의 본질은 아픔을 피하는 기술이 아니라, 기꺼이 아플 준비가 되어 있는 상태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우리는 왜 굳이 그 위험한 문을 열어젖히는 걸까요? 타인의 판단이 두려워 꽁꽁 숨겨두었던 나의 진짜 모습을 왜 굳이 누군가에게 보여주고 싶어 안달하는 걸까요? 아마도 그것은 진실한 내 모습으로 연결되고 싶다는 간절한 열망 때문일 겁니다. ‘있는 그대로의 나’를 보여주어도 괜찮을 거라는 무모한 믿음이 우리를 사랑으로 이끕니다.
삶의 근원적인 감정들을 섬세한 시적 언어로 풀어내는 영국 시인 '데이비드 화이트'는 ‘취약함’에 대해 이렇게 풀어냈습니다.
취약성은 우리가 약하다는 증거가 아니라, 우리가 살아있다는 증거입니다. 취약해지기를 거부하는 것은 곧 세상의 손길이 우리에게 닿지 못하게 막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가 무언가를 깊이 사랑할 때, 우리는 가장 취약해지며 동시에 가장 온전해집니다. - 『위로』
그의 말처럼 마음의 빗장을 풀고 누군가를 받아들이면 신기하게도 내 안의 것들이 자라나기 시작합니다. 타인의 슬픔에 귀를 기울이는 공감이 커지고, 바쁜 일상 중에서도 기꺼이 시간을 내어주는 넉넉함이 생겨나죠. 그렇게 누군가를 지독히 아끼는 나를 마주할 때 비로소 깨닫게 됩니다. 너를 사랑하고 있는 나를 비로소 사랑하게 되었다는 사실을요.
물론 상처받지 않는 법은 간단합니다. 꽤나 방어적인 태도로 타인과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며 살아가면 되죠. 하지만 그 견고한 성벽은 나를 보호하는 동시에 고립시킵니다. 상처받지 않겠다는 선언은 곧 누구와도 깊은 유대를 맺지 않겠다는 의미와 같습니다. 누구도 허용하지 않는 건 결국 혼자서 모든 걸 감당하다가 언젠가 무너질 날을 기다리는 일이 되어버립니다. 아픔을 느끼지 않으려다 내 안의 기쁨과 생동감마저 함께 마비시켜 버리는 셈이죠.
화이트는 이를 ‘씩씩하게 상처받을 수 있는 능력(Robust Vulnerability)’이라 표현하며 삶의 태도를 정의합니다. 상처에 매몰되는 것이 아니라, 상처받을 수 있을 만큼 내가 세상을 향해 열려 있다는 증거로 받아들이는 역설. 그 용기가 우리를 더 단단하게 만듭니다.
그저 상처받지 않으려고만 한다면, 작은 상처에도 속수무책으로 무너지는 사람이 되고 맙니다. 그러니 상처를 허용하는 일 자체가 나를 열어 보이는 개방성이고, 세상에 나를 내어주는 통로가 되는 셈입니다. 그러면 상처 속에서도 삶을 다시 살아낼 힘을 간직할 수 있게 되죠. 그 통로를 통해 사랑을 건네는 누군가가 반드시 있을 테니까요.
오래전부터 이름 모를 이들의 입술을 빌려 전해 내려온 ‘삶을 위한 지침’ 속에는 이런 문장이 머물고 있습니다.
사랑은 깊고 열정적으로 하라. 상처받을 수도 있지만, 그것만이 완전한 삶을 사는 유일한 길이다.
이 말은 상처를 억지로 참으라는 뜻이 아닙니다. 상처가 두려워 삶이 주는 그 깊고 풍부한 맛을 포기하며 살지 말라는 다정한 권유입니다.
사랑은 분명 상처받을 위험이 따르는 일입니다. 하지만 그 위험을 회피한 삶 끝에 기다리는 것은, 단 한 번도 자기 자신을 온전히 만나지 못한 허무함뿐일 겁니다. 이제는 도망치기보다 정면으로 마주하고 싶습니다. 조금은 서툴고 아플지라도, 상처를 허용할 줄 아는 그 무방비한 다정함으로 온전한 삶을 향해 한 걸음 더 내딛고 싶습니다. 당신은 지금, 누구에게 그 거리를 허락하고 있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