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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요롱박 Apr 05. 2021

[이 시국에 장막 희곡] 내가 희곡을 계속 써도 될까?

요롱박의 장막희곡 1

2021년. 4월 5일. 월요일. 날씨 매우 좋음

진행상황 - 0페이지


"장막희곡을 써야만 한다!!" 라는 강력한 의지로 시작하게 된 이번 프로젝트. 

그런데, 내가 해 낼 수 있을까? 



연기 전공으로 대학을 다니던 시절이 떠 올랐다. 

나는 키도 크고 뼈도 굵은 체형을 가지고 있어서 '흔한 여자 주인공'의 이미지에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외형을 갖고 있었다. '흔한 여자 주인공'의 이미지라 함은 여린 소녀 같은, 여리여리한, 상처 입은 작은 새 같은, 오필리어(햄릿)나 니나(갈매기) 같은 그런 이미지이다. 물론 2021년 지금 이라면 다양한 이미지의 여자 주인공을 만들 수 있겠지만 라떼-는 말이지 그땐 그랬단 말이지. 


그래서 당시의 나는 조연을 주로 맡아야 했다. '주인공이 자주 들리는 동네 포장마차의 주인 할머니' 라던지, '주인공을 유혹해서 이야기를 꼬아버리는 요부' 라던지. 하는 감초같은? 혹은 아주 변두리의? 잠깐 나왔다 들어가는? 그런 역할들이었다. 20대 초반의 대배우를 꿈꾸던 나에게는 영 속상한 역할이었지만 그래도 맡은 역을 최선을 다 해서 표현하는 것이 배우의 자세라 생각해서 늘 최선을 다 했었다. 


그런 저런 인물들을 연기하며 나름 요령이 생겼던 나는 졸업 작품으로 '레이디 맥베스'를 연기하게 되었다. 세상에 레이디 맥베스라니. 물론 <맥베스> 라는 작품의 주인공'맥베스'의 아내 역할일 뿐이지만, 내가 그 전까지 맡았던 그 어떤 역할 보다 비중이 있고 무대에 서 있는 시간이 가장 길며 커튼콜 순서가 가장 뒷쪽이었던 역할이었다. (그리고 비교적 젊은!) 나는 자신이 있었다. 그 동안 학교에서 공연을 쉬지 않고 해 왔었고 나름 방법을 찾았다고 생각했다. 당당하게 첫 연습에 참여했다!

하지만 모든 이야기가 그렇듯, 첫 리딩을 한 날 나는 온 몸이 땀에 젖어서 집으로 와야 했다. 


나는 지금껏 작품의 주된 서사에 영향을 미치는 역할을 해 본 적이 없었다. 

그렇게 오랜 시간 무대에 서 있어야 하는 역할을 해 본 적이 없었고! 

그렇게 긴 대사를 외워야 할 일이 없었다! 

그러니까 나는 주연 배우의 근육이 없었다. 

졸업 작품 <맥베스>를 하며 내가 가장 많이 했던 생각은 '내가 졸업 하고도 연기를 계속 해도 될까?' 였다. 작품 하나를 오롯이 책임질 준비가 1도 안 된 내가, 연기를 계속 해도 될까?



작년 2020년, 코로나 덕분에 생각할 시간이 많아진 어느날.

다시 그 질문이 나를 덜컥 주저 앉혔다. 

"내가 희곡을 계속 써도 될까?"


시국이 그랬다. 준비가 끝난 공연도 뉴스 발표 하나에 '취소'되던 날들이 이어졌다. 

보는 것이 아닌 경험하는 예술, 연극이 전멸하고 있었다. 

바다 한 가운데에 남겨진 모래톱에 가까스로 서 있는 기분이었다. 점점 디딜 곳이 없어지는,

그리고 지난 내 글들이 그랬다. 긴 호흡으로 인간이나 삶을 이야기 하지 못하고 있었다. 

짧게 반짝하는 단편적인 아이디어들로 겨우 겨우 기워놓은 내 희곡들은

긴 서사를 담을 근육이 없는 물커덩 물커덩한 슬라임 같았다. 



제법 긴 시간 마음을 비워내야 했다. 틈틈히 솟는 자기혐오를 걷어 내야 했다. 

그런 시간들이 지났다. 그리고 2021년 봄이 왔다. 


이 시국이지만, 이 시국이기에 더더욱 장막희곡을 쓰기로 했다. 

누가 그랬다 '아무 것도 하지 않으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고. 

그말이 맞지. 뭐든 해야 한다. 뭐든 하기로 했다. 

근육이 없으면 만들면 되지? 근육을 만드려면 쇠질(쇠로 된 운동기구로 운동하기) 만한게 없다. 

그리고 글 쓰기의 쇠질이라 함은 마감이라 할 수 있겠다. 


오늘은 장막 희곡 쓰기의 첫 마감날. 

내가 왜 그토록 장막 희곡을 쓰려 했는지 기억해 보기로 했다. 


꽃이 피는 계절, 잎이 돋아 나는 이 계절에 시작한 프로젝트는 과연, 풍성하고 푸르른 초록의 완고를 만날 수 있을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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