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년대 엄마들은 손을 놀리는 일이 없이 살림에 보탬되는 일을 찾았다.
보자기 한 보따리 무언가를이고 집으로 들어오는 엄마는 요술쟁이다. 보따리에 장갑을 꿰매는 일을 하는 부업 꾸러미가 있거나 털옷에 수을 놓는 부업이 들어있기도 했다. 어떤 날은 양말을 뒤집에 발가락이 있는 입구를 바느질로 정리하기도 하고 또 어떤 날은 옷의 보푸라기 실을 쪽가위로 뜯어내기도 했다. 엄마의 부업은 다양하고 새로웠다.
우리 집 마루에는 옆집사는 국이 아줌마와 윗집의 옥이 엄마가 함게 부업 보따리를 펼쳤다. 그러면 우리는 국이네 영희 언니와 영도 윗집 옥이와 놀아야 했다. 영도랑 옥이랑 나랑은 같은 나이라 늘 짝꿍처럼 다녔다. 엄마들이 부업 보따리를 펼 때면 우린 당연한 듯 뒤산에 올라가 약수터까지 누가 먼저 가는지 달리기도 했다. 우리 집 뒤에 옥이네 밭이 있었다. 밭고랑 오른쪽 아래 귀퉁이를 지나면 우리 집 뒷마당과 연결이 되어 있었다. 우린 밭과 뒷마당을 뱅뱅 돌며 놀았다. 내 동생 3명과 옥이 동생 둘이 함께 어울리면 줄줄이 비엔나소시지 마냥 아이들은 꼬리물기를 하듯 놀았다. 영도보다 나이 많은 영희 언니는 우리랑 안 놀았다. 국이도 키만 컸지 우리랑은 안 놀고 머스마들끼리 어울렸다.
우리가 집 밖에서 노는 이유는 몰랐지만 엄마들 옆에 얼쩡거리면 방해가 된다는 생각이었다. 아니 엄마들이 나가 놀라고 해서 밖으로 나갔는지도 모른다. 우리 집에서 50미터도 근처에는 아이스크림 과자를 마드는 공장이 있었다. 우린 아이스크림을 먹어보질 못했다. 그러나 깔때기 모양의 아이스크림 과자를 만드는 공장에서는 과자를 팔았다. 과자를 만들다가 찌그러진 깔때기 과자랑 부서진 거 깨진 걸 팔았다. 엄마가 부업 해서 돈을 받아오는 날이면 빨간 바께스를 들고 동생들이랑 줄줄이 그 공장에 갔다.
"아저씨 과자 파지 난 거 한바께쓰 주세요"
"오냐 은미 왔구먼, 동생들 델꼬왔네"그러면 아저씨는 동생들 윗옷을 반으로 접어 과자 파지를 담아주셨다. 보너스인 셈이다. 난 과자바께스와 동생들 옷에 감싸진 아이스크림 밑둥치 파지 난 깔때기 과자를 들고 의기양양하게 집으로 돌아왔다. 동생들이 많은 게 신나는 순간이다.
60년대생인 나는 이른바 K 장녀다. 아버지 담배 심부름도 내가 해야 했다. 밤에 "은미야 아버지 담배 좀 사오이라~" 그러면 "네~" 하고 대답하지만 난 가기 싫을 때가 많았다. 우리 집 대문 옆에 커다란 아카시아 나무가 밤에는 무서운 소리를 냈다. 낮과 달리 모양도 변해서 귀신 머리 풀어 헤친 것 같기도 하고 말야. 그래도 난 심부름 담당이었다. 맏딸이니까. 이유 없이 그냥 시키는 대로 했다.
이상하다. 왜 어린 시절이 또렷하게 기억이 나고 떠오르는지? 한 번도 의식적으로 기억하려 애쓰지도 않았는데 불현듯 불쑥 올라오는 기억의 그림자는 때론 웃음이다가 또 때론 눈물이고 추억이다. 이제 인생이라는 깔때기로 걸러 허허거리지만 아직 앙금이 남아있는 일도 있다. 아마도 그 앙금 다시 부유물로 둥둥 떠올라 다 건져내라는 신호인지도 모른다.
굳이 기억하지 않아도 될 것 같은 이야기가 떠오른 때면 흠칫 놀라 비공개 글로 저장하는 걸 보면 나의 어린 시절은 좀 슬픔 모드가 많았나 보다. 한 번도 어린 시절을 꺼내려는 마음도 없었는데 참 이상하다. 세월은 과거의 나를 보고 지금의 내게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건지?
#엄마 #부업 #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