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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씀씀 Jun 25. 2020

블라인드야 내 소원을 들어줘

회사에서 가장 빠르게 소통하는 방법

대표님도 블라인드를 보신다


  블라인드는 익명의 직장인 커뮤니티 어플이다. 회사 메일 계정로 회원가입이 가능하고 가입 후 자신의 회사 소속을 설정한 뒤 커뮤니티를 이용할 수 있다. 블라인드는 익명으로 운영되기 때문에 거침없는 회사 평가, 비판이 오고 가는 날 것의 장이다. 


  인사팀은 매일 아침, 블라인드라는 어플을 통해 사내 이슈나 업무에 대한 직원들의 불만은 없는지 감시한다. 더불어 회사에 불성실하거나 직원들에게 불미스러운 언행을 일삼는 사람을 색출할 때 블라인드를 도구로 사용한다. 대표도 직원들이 무슨 생각을 가지고 일하는지 블라인드를 통해 알게 된다. 


  '블라인드 그 글 봤어?, 계속 조회수 올라가고 댓글 난리도 아니야!' 나와 직접적으로 관련된 이야기니 사무실에서 화제가 되기에는 충분하다. 나도 캡처본으로 이슈 글을 동료에게 전달받아 보다가 답답해서 블라인드에 가입했다. 


  블라인드에는 수위조절이 없어 글의 온도 차이가 컸다. 회사에 대한 진심 어린 생각을 담담하게 적어 내려 가는 진지 파도 있고 지금 내가 힘들어 죽겠다 떼쓰는 불만러들도 있었다. 공통적으로 회사 복지, 업무 방식, 상사에 대한 불만이 BEST 소재였고 말투와 내용을 보아 글쓴이의 업무경력은 앳되보였다. 


  임원들과 관리자급들은 블라인드로 직원들의 이야기를 엿보면서 부하 직원들의 수준이 낮아서 이런 상황이 생긴 거라고 말했다. 젊고 나이 어린 직원인 것은 알았지만 회사를 대하는 태도와 생각이 이것밖에 안 되는 것인지 실망스럽다고 한탄했다. 


개인적인 불만을 과장해서 늘어놓는 이야기들에 귀 기울일 필요는 없다 하더라도 많은 직원들이 공감하고 아파하는 이야기가 무엇인지는 관심 없어 보였다.


  그래도 회사는 수많은 직원들의 이야기를 무시할 수는 없었다. 블라인드의 BEST 글에 올라온 내용을 바탕으로 바뀌지 않던 것들이 바뀐 경우도 생겼다. 백번 상사에게 말하는 것보다 블라인드에 글 쓰는 게 더 빠르다는 우스갯소리도 나오면서 블라인드의 인기는 식지 않고 있다. 큰 변화는 아니었지만 직원들의 이야기를 의식한 듯한 회사의 움직임이 느껴졌다.


  근본적으로 회사는 직원들과의 진솔한 소통을 거부한다. 직원들의 의견을 반영하고자 말하라고 강요하지만 실제로 듣고 싶은 이야기만 듣는다. 요즘 애들은 상사 무서운 줄 모르고 할 말 다한다는 소리 안 들으면 다행이다. 그렇다 보니 직원들은 계속 음지의 공간을 찾아 자신들만의 이야기를 한다. 내가 대표가 되지 않는 한 회사는 나의 이야기를 모두 들어줄 수 없다.


  블라인드는 몇 가지 소원은 들어줄 수 있지만 조직의 소통창구가 돼서는 안 된다. 개인의 이야기가 일반화되어 직급 간의 갈등을 불러내기도 하고, 자신의 자리에 최선을 다하고 있는 선량한 동료의 의지를 깎아낼 수 있다. 사람 간의 소통이 사라지고 어플을 통해 조직이 움직인다는 사실이 슬프다. 블라인드가 자유가 되는 그 날을 꿈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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