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업은 없지만 직장은 있습니다.

프롤로그

by 계발자

딱히 하고 싶은 건 없었으니까

나는 진로, 직업에 대해 특별한 꿈도 없었고 하고 싶은 무언가가 딱히 없었다. 아무생각 없이 수능/내신 점수 잘 받아야지 라는 생각 뿐이었다. 매주 성당을 나가고, 봉사활동을 하면서 주말을 보내는 평범 그 자체였다. 고 3, 대학교 학과를 고민할 때 해본게 봉사활동 밖에 없었어서 이것과 연관지어 막연하게 사회학과 진학을 막연하게 결정했다. 부모님은 힘든 길이라며, 반대했고 그러고나니 대학교에는 어떤 과들이 있는지 제대로 알아보지도 못한채 국어국문학과에 덜컥 진학했다. ‘공부 열심히 하면, 선생님 정도는 생각해볼 수 있지 않겠어?’ 라는 부모님의 적당한 기대에 타협한 최선의 선택이었다.


그에 비해 내동생은 남달랐다. 간호학과를 진학했고, 부모님의 자랑스러움을 한몸에 받으며 S대 병원 간호사 취직까지 탄탄대로의 직업과 커리어를 쌓는 동생은 우리집 간판이었다. 간호사로 일한다는게 업무적으로나 인간관계 ('태움'이라는 간호사 문화)로나 힘들다는 건 익히 들은바 있어 항상 걱정의 중심인 동생을 질투하거나 서운함을 느꼈던 적은 없었다. 오히려 나도 더 동생에게 힘이 되고 지원해줄 건 없는지 살펴보는데 익숙했다. 전문직이라는 타이틀을 넘어서서 직장이 없어도 ‘나는 간호사’라는 정체성이 확고한 동생이 부러웠다. 더군다나 사람의 목숨을 다루는 일이니 가치를 돈으로 매길 수 없는 직업 소명의식도 더 빛나보였다.


8년의 직장생활

대학 졸업 후 공백이 있으면 취업에 불리하다는 이야기에 휴학없이 4년제를 바로 졸업한지라 급하게 인턴 자리를 구했다. 당시 뷰티 시장의 생태계를 바꾸는 L사 뷰티 드럭스토어의 인턴 자리였고, 졸업예정자로 졸업과 동시에 일을 시작하게 됐다. 시작은 비정규직이었지만 6개월 간의 인턴생활을 통해 처음 이 일이라면 정규직으로 쭉 해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사람들과 어울리며, 즐겁게 일할 수 있는 분위기나 자율적으로 업무를 맡겨준 당시 점장님 덕분에 좋은 시작을 할 수 있었다.


우연히 시작한 인턴이었지만, 6개월 후 정규직 전환이 된 후 성실함과 우직함을 인정받아 매장 점장을 맡게 되고 온라인 커머스를 운영해보는 듯 내가 가진 능력 이상으로 많은 경험을 했다. '컴퓨터 활용능력 자격증, 토익' 남들 다 가진 자격증 하나 없었지만 시작하면 끝을 내는 성격, 뭐든지 뭐라도 해내려는 추진력과 책임감 덕분에 빠른 나이에 두터운 경력을 갖게 됐다. 일에 한창 빠져서 성취해나갈 때는 몰랐다. 내가 지쳐가고 있다는 것도, 일 외에도 내가 좋아하는 것은 무엇인지, 일과 나의 일상을 분리하면서 스스로 돌봐야한다는 것을.


번아웃의 일종일지 모르겠지만 어느순간 일에 대한 회의감이 크게 밀려왔다. 내가 하는 일의 가치가 뭘까. 회사 명함을 떼고 나는 나를 어떻게 소개할 수 있는가. 영업이라는 직무는 있었지만 나만의 고유한 업무 능력을 요하는 일은 아니었기에 회사 이름, 직무를 빼고서는 내가 할 수 있는 나만의 고유 일에 대한 정체성을 느끼기 어려웠다. 명함에서 회사 이름과 팀을 빼면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란 건 없는 직장인이었다. 그래서 더욱 직장이 아닌 직업을 가져야 한다는 강박이 생겼다


직업은 없지만 일을 잘 한다는 건

뒤늦게 전문직에 종사할 만한 자격증 시험도 생각해봤지만 성향, 적성에 따라 도무지 맞는 일은 없어보였고 첫 직장에서 7년이라는 시간을 거친 뒤 30대가 돼서 새로운 직업에 뛰어들기란 쉽지 않았다. 연봉을 포기하고라도 신념을 따르고자 스타트업에 문을 두드렸으나, 면접에서부터 탈락했다. 계속 백수로 살아갈 수는 없을 것 같아 이전 경력을 빌어 온라인 커머스 유통업계에 이직하며 직무 커리어를 넓혀보려고 도전중이다.


'어디서 무슨 일이든 주어지면 할 수는 있으니까'라는 마음에서 시작했기 때문에 지금도 전문적인 업무 역할을 가지고 일하는 건 아니다. 남들에게 공유할만한 대단한 업무지식은 없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직장생활을 지속할 수 있었고 승진시기를 한 번도 놓친 적 없었다. 일을 잘한다는 건 자격증, 엑셀 고수, SQL 전문가, 개발자 등 특화된 능력만이 전부가 아님을 나 스스로 증명중이다.


직업은 없었지만 직장을 꾸준히 가지면서 나름 꽤 괜찮은 사회생활을 할 수 있었던 나의 이야기를 기록해보려고 한다. 지난 8년 동안 일잘러가 되기 위해 들었던 인터넷 강의, 자기계발 책 등 교육에 관해서 할만큼 했지만 약간의 플러스가 될 뿐이었다. 진짜 일잘러의 비결을 나에게서 찾고 무색의 직장인으로서 자존감을 높이기 위한 이런저런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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