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스로 낮추지 않을 용기를 가질 때 성장한다.
늦은 점심, 여섯 시가 다되어 한 줄 먹으려던 김밥을 다시 덮었다.
네가 그렇게 바빴니? 왜 누락한 건지 설명할 수 있어? 지금 그걸 핑계라고 대는 거야? 하루에 이천만 원 매출, 그런 것도 아니잖아? 아니, 그 정도도 못하면서 얼마나 정신없었다고 공지도 못 보고 회신도 안 했다는 거야?
갑작스러운 상사 A의 전화였다. 정신없는 언어폭력에 두들겨 맞고 어느 정도 시간이 흘렀는지도 기억이 안 난다. 내가 무슨 말로 변명한 건지 정확히 모르겠다. 식사 때를 놓친 나를 위해 김밥을 사다 준 동료의 얼굴을 보니 그저 눈물만 흐른다.
끝내 그날 김밥은 먹지 못했다.
후에 당시 상황을 옆에서 지켜보았던 상사 B의 귀띔으로 인해 조용히 욕만 먹으면 되는 통화였음을 나중에야 깨달았다. 상사 A는 팀장에게 받은 스트레스를 풀 대상이 필요했다고 한다. 옆에서 팀장이 자신을 지켜보고 있으니 실수에 대해 바로잡는 본보기를 보여야 한다는 사명감으로 더욱 목소리를 높였다고 한다.
억울했다. 그 순간 내가 전화를 내가 받지 않았다면 내 직속 상사 C 가 대신 욕먹을 수도 있었다. 왜 하필 최종 담당자도 아닌 내게 그렇게까지 막말을 던졌을까.
다음날 나는 내 상사 C에게 어제 일화에 열변을 토하며, 내가 인턴 출신에 나이도 어리고 아직 일한 지 얼마 안 된 신입이라는 이유로 갈군 것이라고 뜬금없는 신분제도를 논했다.
상사 A도 경력직이고 경력직 직원끼리는 서로 능력을 치켜세워주고 함부로 대하기는 껄끄러우니 본적 없는 만만한 자사 인턴 출신 직원들에게는 막대한다고 생각했다. 나 대신 욕먹어야 했던 상사 C도 경력직이었기 때문에 일부러 나에게 통화한 것이라 생각했다.
상사 C는 고맙게도 나를 나무라지 않고 괜히 네가 어제 충격에 민감한 거라며, 대신 욕 못 먹어서 미안하다고 나를 달래주었다.
유독 실수에 대한 민감하게 반응하는 조직이 있다. 내가 속한 조직은 유독 잘잘못에 대한 부서 파악에 혈안이 된 곳이었다. 일을 바로잡기 위함이 아니라 최종적으로 그래서 어느 팀이 잘못한 거야 답을 찾아야 한다. 잘못된 업무를 바로잡고 재발하지 않기 위한 노력보다 오너에게 잘 보이기 위한 팀장들이 부서원의 실수를 손으로 가리기에 바빴다.
궁금증이 생겨도 묻지 않았고 말할 기회가 있어도 말하지 않았다. 그것도 모르나? 눈으로 욕먹거나 일 못하는 사람, 나대는 사람이 될 것 같다고 했다. 책임진다는 것은 잘못을 인정하겠다는 의지 표현이기 때문에 아무도 책임질 일은 하지 않으려고 했다.
하지만 아무리 책임지는 사람 없다고 한들 회사에서 작고 큰일이 안 생길 수 있겠는가. 질책성 심의가 시작되면 모두가 쫄기 시작한다. 한번 시작한 쫄기는 혼자 끝내지 않고 스트레스 질량 보존 법칙에 따라 아래로 전하고 전하고 전해졌다. 만만한 사람을 골라 자신이 받은 모욕감, 불만을 폭발시켜 상대방을 처참하게 무너트린 후에야 의식을 끝낸다.
일한 지 6년이 넘어도 쫄지 않으며 항상 당당하게만 일할 수는 없었다. 내가 회장님이지 않는 이상 먹고 먹히는 피라미드 관계는 누구에게나 있기 때문에 아마 평생 쫄기에서 벗어날 수는 없을 것 같다. 다만 그때 이후로 나는 나만의 기준을 가지고 쫄았다. 이유 없이 무턱대로 당하는 폭언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스스로 무너지지 않겠다 다짐했다.
물론 수차례 다짐했어도 일하면서 쫄지 않고 일하기는 어려웠다. 익숙해진다고 생각했지만 매번 새로운 쪼기 기술에 정신 못 차리는 날도 많았다. 그때마다 후배들한테 만큼은 스트레스를 남겨두지 않는 리더가 되겠다 마음을 다잡았다.
6년이 흐르고 업무 실수에 대해서는 크게 반응하지 않는 의연함이 생겼다. 실수를 대처할 수 있는 업무 능력이 생기기도 했고, 다양한 경험을 통해 해결안 될 일은 없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하나만 잘못해도 세상이 무너질 것 같고 손발에 땀나던 시절에 비해 업무적으로 성장했음을 몸소 느꼈다.
회사에서 만회되지 않는 영원한 실수로 남을 일은 없다. 다양한 능력을 가진 사람들이 모여있는 조직에서 누군가는 해결방법을 알고 있다. 괜히 먼저 쫄고 자세를 낮출 필요가 없다. 상대방은 내가 쫀 만큼 나를 공격해야 책임을 면할 수 있다. 내가 쪼는 모습을 보인만큼 상대방은 기세 등등해진다.
쫄기 전에 내가 실수한 게 없는데 놀란 건 아닌지 다시 살펴봐야 한다. 막상 쫄기 시작하면 실수가 아닌 일도 실수로 둔갑하는 경우가 있으니 침착하게 문제에 접근하는 태도가 필요하다. 상황을 회피하고자 스스로 합리화하기 위한 변명거리를 찾는 비겁함은 보이진 않았으면 한다.
나는 큰일은 큰일답게 작은 일은 작은 일답게 대해줘야 한다는 나만의 기준을 세웠다. 작은 일을 너무 부풀려 스트레스받지 말고 큰일은 크게 중요성, 심각성을 제대로 인지하자는 게 업무 철학이다.
내가 쪼는 기준을 명확하게 두니 오히려 업무 스트레스에 크게 흔들리지 않았다. 나의 기준과 달리 나를 쫄게 만드려고 달려드는 사람들은 앞으로 많겠지만 내가 흔들리지 않는 이상 아무도 날 쫄게 할 수는 없다.
“만만한 줄 알았다면 사람 잘 못 골랐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