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 오는 날, 오늘따라 기분이 좋다.
비에 덜 젖으려고 큰 장우산을 들고 나왔다. 에어컨 때문에 카페가 춥지 않을까 싶어 얇은 바람막이를 하나 챙겼다. 노트, 아이패드, 운동복, 필요한 화장품 몇 가지 백팩에 넣고 대학생 비주얼로 집을 나섰다. 아침부터 몸에 안 맞는 공부, 땀 흘리는 운동 외에 딱히 한 건 없지만 오늘따라 뿌듯한 기분이 든다.
스타벅스에서 자몽 허니 블랙티를 따뜻하게 마시며, 오후를 마무리하는 오늘이 참 좋다.
오전부터 새롭게 시작한 온라인 강의를 듣느라 아침 8시에 일어났다. 오랜만에 나에게 굉장히 이른 아침이다. 안 하던 짓을 하려니 코 닿으면 엎어질 수 있는 침대 유혹을 뿌리치느라 아침부터 과자를 씹어먹었다. 과자를 먹기 위한 핑계인지 모르지만 아침부터 공부하려니 몸이 근질거렸나 보다.
하루치 온라인 강의를 다 소화하려면 빨리 감기 1.5 배속으로 영상을 재생해도 3시간이 걸린다. 아침부터 졸리고, 후회되고 이 공부가 나에게 의미가 있는 건지도 헷갈린다. 공부해서 나쁘진 않겠지만 굳이 안 해도 되는 걸 시작한 건가 과자를 씹으면서 생각 없이 눈만 뜨고 있다.
오후 12시가 되어 요가 수업시간을 받고 개인 운동 헬스장으로 향했다. 중간에 점심 먹을 시간이 없어서 3,000원짜리 한 끼 대용 셰이크를 마셨다. 지하철에서는 이동하는 내내 아침에 마저 못 들은 온라인 강의를 들었다. 지하철 소음 때문에 들릴락 말락하는 강의를 들으며 작은 핸드폰에 집중했고 목적지에 다가올수록 마지막 강의가 보인다. 지하철에서 이동하면서도 강의를 들어야 한다니 갑자기 고시생이라도 된 듯 정신이 없다.
그동안 잡념, 앉아있는 싸움을 혼자 반복하느라 운동보다는 생각하기에 몰두했다. 오늘은 여유 있게 운동에 시간을 투자해서 다른 생각 없이 집중해야겠다 마음먹었다. 헬스장에 도착해서 본격적으로 운동복으로 갈아입고 전투적인 자세로 탈의실을 나간다.
헬스장 음악소리 bpm이 빨라진다. 정신없이 리듬에 맞춰 다리를 움직이며 스텝퍼를 밟았다. 15분 만에 200 칼로리를 소모했고 비 오듯 땀을 흘렸다. 창밖에 비도 흐르고 나도 스텝퍼 위에서 흘러내리고 박자에 맞춰 정신 나간 듯 내 움직임에 집중했다. 준비 운동 후 개인 레슨을 마치고는 러닝머신에 올랐다.
러닝머신에서 걸을 때는 항상 티비를 켜고 시간이 흐르기만을 기다렸다. 움직이고 있지만 내가 운동하는 게 아니라 러닝머신 1시간 정도는 해야 살이 빠진다니까 한 거다. 이제는 과감히 티비를 켜지 않고 창가에 비친 나의 모습만을 바라보며 1시간을 채운다. 뛰든 걷든 러닝머신을 붙잡고 힘들어하는 내 모습을 그대로 바라보면서 운동한다.
목욕하며 욕조에서 밀도를 측정하는 법을 발견하고 유레카를 외쳤던 아르키메데스처럼 비 오는 창가에 비친 나의 모습을 바라보며 희열을 느꼈다. 한치의 빈틈도 없이 오전 8시부터 시작된 하루 안에서 나를 위해 노력하는 내가 보인다.
노력의 크기, 중요도, 결과에 관계없이 오늘 하루를 열심히 살아내기 위해 아침부터 졸고, 오후에 뛰어다니며 땀 흘린 하루가 행복했다. 지금 이 시간이 나에게 어떤 결실을 맺을지 모르지만 아무런 보상이 없다고 하더라도 나는 오늘 하루에 만족한다.
막연히 하고 싶었던 공부를 해서? 땀 흘리는 운동을 해서? 내가 무엇을 했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그저 오늘 나를 위해 시간을 보낼 수 있음에 감사하고 기분 좋다. 다른 누군가, 무엇에 의지하지 않고 나의 가치를 스스로 증명하기 위해 노력하는 시간이 소중하게 느껴진다. 나를 보여줄 수 있는 것은 오로지 ‘오늘, 지금의 나’이며 다른 어떤 수식도 필요하지 않다.
회사, 명함, 사원증이 없으면 나는 없는 줄 알았다. 내가 살아온 세월을 연봉이 증명하고 나의 가치를 회사의 규모가 말해준다고 생각했다. 물론 힘들게 올려놓은 연봉 앞으로 깎을 생각은 없지만, 그만큼 나의 가치를 더 높이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나는 오로지 나에 의해 설명되고 보일 뿐 불필요한 수식어가 없어지니 있는 그대로 담백하고 솔직하다. 도전하는 나의 모습이 참 마음에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