멈춰버린 시간
비 오는 월요일 아침, 10시 모닝콜이 울리기 5분 전에 눈이 떠졌다. 백수에게 모닝콜은 나와의 약속일뿐 허둥대지 않고 침착하게 침대에서 뒤척여본다. 남들보다 늦게 시작한 아침이지만 오늘은 어떻게 시작해볼까 스케줄을 정리해보려 책상에 털썩 앉았다. 책상에 앉아보니 창가 너머로 들리는 빗소리가 힘차고 좋다. 원래 아침 고정 일정인 공복 유산소를 하러 헬스장에 가야 하는데 비 오는 소리를 조용히 듣고 싶다. 책상에 앉아서 오늘의 계획을 잠시 수정한다. 빗소리를 들으면서 할 수 있는 게 뭐가 있을까. 자격증 시험공부하자니 아침부터 몽롱하게 집중하기는 싫고 조용히 책을 읽어야겠다.
엄마는 은행에 세금을 내러 갔다 온다고 외출 차비를 하고 있었다. 초등학생도 있는 스마트폰이 우리 엄마는 없다. 인터넷? 컴퓨터 데스크톱은 고장난지 10년이 넘었고 컴퓨터를 사용하지 않는 엄마는 세금, 은행업무, 전화로 시키는 배달 외에는 모두 직접 가서 포장한다. 요즘 같은 시대에 실버폰이라도 드리려고 했지만 집전화를 고수하는 전통주의자 엄마는 휴대폰을 기어코 사양한다. 덕분에 30년 동안 우리 집 전화번호는 바뀐 적인 없다.
엄마가 외출한 뒤 간단하게 엄마가 갈아놓은 토마토를 마시고, 훌라후프를 30분 정도 돌리고 거실에 앉아 티브이를 보며 엄마를 기다렸다. 엄마는 1시간 정도가 지나서 집에 돌아왔고 고구마, 아침 샐러드, 빵을 사들고 돌아왔다. 엄마가 사준 샐러드를 먹고 본격적인 하루를 시작해보려고 나의 방으로 들어갔다. 엄마는 함께 사온 고로케를 한 개 먹었는데 이후로 제대로 식사를 했는지 안 했는지는 모르겠다.
숨고 싶은 사람들 김봉철 작가의 책을 읽었다. 36세 미혼 백수가 살아가는 블랙코미디 에세이지만 그의 인생을 읽으면서 마음이 뭉클했다. 그냥 백수는 아니고 처절하게 외로움과 사투하는 백수의 이야기였다. 책을 천천히 읽고 나의 감상을 적어놓으며 정리하면서 어느 정도 시간이 흘렀다고 생각했는데 아직 12시 40분이었다. 오늘 아침은 책 한 권도 빠르게 다 읽고 시간이 얼마 안 지나서 뿌듯했다. 오늘 하루가 길어진 것 같아 시간을 잘 쓰고 있다고 뿌듯함을 느낀 것도 잠시 핸드폰으로 카톡을 확인하려 보니 오후 2시가 넘어가고 있었다. 내 방 시계 건전지가 다 닳아 시간이 멈췄던 것이다. 아침에 책 한 권 읽었을 뿐인데 오후가 다 지난 것 같아 괜히 빠르게 지나간 시간이 야속하게 느껴졌다. 나에게 빈둥거릴 시간은 없는 걸까.
거실에 앉아있는 엄마에게 소리쳤다. “시계가 멈췄어!” 건전지를 챙겨 와 시계를 시간에 맞추어 시침, 분침을 만졌다. 그러고 보니 내가 샐러드를 먹고 방에 들어온 이후로 엄마는 뭐 하고 있었지? 다른 소리 없었던 것 보니 계속 TV 보는 일 외에 특별한 것은 없었던 것 같다.
하루 종일 집에 있을 때면 가장 많이 마주하는 것이 내가 몰랐던 엄마의 하루를 보게 된다는 것이다. 아침 8시에는 아버지 아침을, 오전 11시에는 나의 아점을 챙기고 1시에 출근하면 자정이 되어 집에 왔기 때문에 대학 졸업 후 가족들의 오후, 저녁시간에 대한 기억이 없다. 휴일에는 친구들과 놀거나 집에서 쉬더라도 집에 누워 하루 종일 음식을 주워 먹는 일외에 할 줄 아는 게 없었다.
엄마는 전업주부로 30년 동안 가족 외에 아무도 없이 살아왔다. 개인적으로 운동도 아파트 계단을 오르는 일 외에 친구 만나는 일도 크게 없다. 엄마의 하루는 TV 보는 시간이 가장 많다. 종교생활, 모임도 없고 하루 중 유일하게 장 보러 외출하는 것 외에 엄마의 하루는 항상 같은 자리에서 변하지 않는다.
오늘도 엄마는 맛있는 녀석 TV를 틀어놓고 소파에 기대 살짝 굽은 등을 말아 앉아있고 앞머리는 롤로 말아 올린 채 저녁 고민을 시작한다.
지금까지 정신없이 나의 삶을 살아가느라 보지 못했던 엄마의 하루. 엄마는 자기만의 혼자 시간을 가질 수 있음에도 자신을 위한 시간은 쓰지 못한 채 그저 가족들의 반찬, 빨래, 집안 살림 외 겨우 숨 돌리는 일이 TV 보는 일이었다. 그나마 영화관 혼자 가서 영화보기를 즐기는 것도 코로나 이후로는 안간지 오래다.
엄마를 TV에서 탈출시켜 어디론가 나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비 오는 날이지만 비 오는 소리, 시원하게 산책 나가자는 말에 엄마는 흔쾌히 신발끈을 묶었다. 비 오는 날이라 양말 젖는다고 싫어할 줄 알았는데 비 좀 맞으면 어떠냐 웃으며 빠르게 나갈 채비를 마쳤다. 마치 나가자는 말을 기다렸다는 듯이 엄마는 나와의 산책을 기다리며 거실에서 홀로 조용히 시간을 보내고 있었던 것 같다.
동네 공원을 걸으며 빗방울 맺힌 토마토 화분, 무궁화, 이파리들의 싱그러움을 보며 즐거워하셨다. 길거리에는 사람이 없어 오랜만에 단 둘이 마스크를 잠시 벗고 길을 걸을 수 있었다. 평소 애교 많고 싹싹한 딸은 아니라 산책하면서 많은 말을 하지는 않았다. 간혹 침묵이 길어지면 민망함에 비가 그렇게 많이 오지는 않아 다행이라며 너스레를 떨었다. 신발이 축축해 다 젖었을 텐데 1시간 이상을 걸으며 의미 없지만 오늘 하루 소소한 대화를 간간히 나누었다.
오늘 새로운 사실을 알았다. 헬스장 돈이 아깝다고 엄마는 아파트 계단 오르기로 운동을 대신하는데 엄마만의 철학이 있었다. 계단을 내려올 때는 계단과 복도를 번갈아가며 내려와야 무릎에 무리가 가지 않는다며 자신의 운동법을 자랑했다. 이제 엄마도 무릎, 관절이 위험한 50대 후반이었다. 산책을 마치고 마트에 들러 장을 보고 돌아왔다. 집에 돌아오자마자 엄마는 저녁 준비를 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또 내일 아침을 고민하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