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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씀씀 Aug 15. 2020

나의 직업이 없다는 건

나의 역할과 존재에 대해 묻는다.


우리 딸들 소개할게


나는 할머니 장례식 장에서 찾아온 수많은 아빠 지인들에게 불편한 자기소개를 당했다.


우리 OO 회사 다니는 첫째 딸,
OO 병원 다니는 간호사 둘째 딸이야


나는 전문직 직업이 아니었기 때문에 남들이 들으면 알만한 회사 계열사 이름으로 소개되었고 항상 동생과 대비되었다. 매번 아빠 지인들이 조문 다녀갈 때면 순서대로 자기소개를 당했고 퇴사한 지 4개월이 되었지만 나는 ‘아직 OO 회사 다니는, 생물학적으로 첫 번째 태어난 딸’이었다.


한 두 번은 괜찮았다. 굳이 장례식장에서 잠깐 지나치는 사이에 구구절절 퇴사하고 쉰 지 얼마 되었고 뭐하며 지내는지 설명하는 것도 이상하다.


나의 퇴사를 알고 있는 외가 삼촌들도 계획은 있냐며 앞으로 나의 행보에 대해 다소 과한 걱정을 했고 정말 퇴사하면 큰일 나고 쓸모없는 잉여인간이 된 것처럼 친척들의 불편한 관심이 계속되었다.



명함은  존재감


가끔 있는 가족 경조사에서 잘 지내냐는 안부와 뭐 하냐는 질문에는 ‘들어서 알만한 기업 이름, 대학 이름, 직업’ 얘기해주면 끝날 것을 백지가 되면 뜻하지 않게 이상한 관심을 받는다. 한두 번은 괜찮았지만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내 명함이 지나가면 모를 아빠의 지인들에게 들춰지는 것이 불편해지기 시작했다.


하루 종일 다니지도 않는 예전 직장 이름에 묻혀 첫째 딸인 나는 아무렇지 않게 아빠 친구들에게 술을 따르며 웃어야 했다.


계속되는 거짓 소개에 불편을 넘어서서 불쾌해지기 시작했고 나는 앞으로 그런 식으로 소개한답시고 부를 거면 소개 자리에 가지 않겠다고 했다. 굳이 설명할 필요도 없지만 그만둔 상태에서 얼버무리듯 소개당할 바에는 없는 사람이고 싶으니 직장, 직업이 당당한 동생을 데리고 다니라고 하고 한동안 장례식 밖을 서성였다.


사회적 논란거리, 퇴사


사람들에게 사회적으로 잘 보이고 부모님의 체면을 위해서라도 직장을 붙잡고 있어야 했을까.


나의 고민, 삶에 대한 고찰을 해보기도 전에 사회적 시선에 갇혀 지금까지 내가 한 결심, 생각들이 다 부질없게 느껴졌다. 어디서부터 잘못되어 나는 퇴사를 결심하고 쉬고 있는 것이고 인생이 꼬인 건지 생각했다. 대학교 전공 선택이 잘못되어 여기까지 흘러온 걸까. 그때 문과라서 죄송한 인문학과가 아니라 자격증, 전문적인 학과를 선택해서 노력했다면 지금 이런 상실감은 안 느낄 수 있었을까 온갖 상상에 빠졌다.


직장보다 직업이 명확하지 않았기 때문에 직장 하나에 흔들리는 나의 모습이 절망스러웠다. 결국 좋은 회사만큼 내가 원하는 일이 무엇인지 찾고 싶었던 여정인데 이렇게 또 주변 사람들의 시선에 무너졌다. 나와의 지독한 싸움이 되겠지 생각했는데 그 이상으로 주변 사람들과 싸우는 것 같다.


나만 생각하고 자유롭게 편하게 보내고 싶었던 시간들에 대한 자신감이 사라진다. 나의 선택으로 묵묵히 잘 가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퇴사는 나만의 문제가 아니라 가족의 문제라도 되는 듯이 논란거리가 되었다.



능력 없음을 인정한다. 싸우지 않겠다.


대체되지 않은 내 직업이 생기지 않는 한 이 고민과 허탈함, 자신감 하락은 계속될 것으로 보인다. 어설프게 직장으로 다시 한번 자기소개 자리를 채우고 싶지 않다. 언제든 흔들리지 않는 나의 일을 찾기 위해 퇴사를 선택했고 인생의 갈림길에서 진지하게 다시 살펴봐야 할 시점이라고 생각했다.


더 이상 할아버지와 할머니에게 매 명절마다 회사에서 나오는 과일, 문화상품권을 드릴 수 없는 처지가 되었지만 앞으로 내가 어떤 사람으로 살아갈지에 대해 고민하고 대체될 수 없는 나의 한 줄을 만들기 위해 노력할 것이다.


나는 첫째 딸이기 전에 ‘나’ 일뿐이며, 어떠한 수식어도 나를 대체할 수 없다. 화려한 수식어가 달린 경력으로 부모님의 어깨를 올려드리면 좋겠지만 이미 나는 그럴 능력이 없고 죄송하지만 부모님의 체면보다 나의 삶을 살고 싶다.


내가 하루 행복하게 웃으면서 일할 수 있는 곳에서 나를 성장시킬 수 있는 무언가를 찾기 위한 여정은 이제부터 시작이다. 퇴사는 자신의 길을 걸어가는 과정 중에 겪을 수도 아닐 수도 있는 흐름일 뿐 하나인데 지나치게 큰 의미를 부여받는다. 생계, 급여가 달린 일이니 그럴 만도 하겠지만 유난히 장래, 꿈, 인생에 대해 생각해보고 경험할 수 있는 시간을 주지 않는 대한민국에서 퇴사자에 대한 불편한 시선을 견뎌내는 능력이 필요하다.


애써 다잡은 마음도 한순간에 흔들린 것을 보아하니 아직 나 스스로 단단하지 못했음을 느낀다. 다만 나는 지금 나의 상황과 시간에 당당해지고 싶고 포장받고 싶지 않았다. 있는 그대로 보일 수 없다면 없는 사람이 되어도 상관없으니 싸우지 않겠다. 나는 백지인 현재 나의 길을 가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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