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씀씀 Nov 03. 2020

서른의 토익스피킹

난생처음 어학 자격증


오늘부터 아침 10시 토익 스피킹 수업을 듣기 위해 해커스 어학원으로 출근한다. 서른 살의 평일 오전 10시 풍경이 회사가 아니라 학원인 것에 어떤 반응을 보여야 할지 모르겠다. 아직 가능성을 시험해볼 수 있는 젊은 청년이라고 말할 수 있음에 위로하며 출근길이 아닌 학원길을 나선다. 오랜만에 지하철을 9시경에 탔더니 다소 비좁은 지옥철 상황에 당황했다. ‘아 아침이 이랬지’라는 추억 아닌 추억도 떠오르고 영업 판매직을 할 때는 텅텅 비었던 출근길 한가한 지하철 풍경도 머릿속을 스쳤다.


나는 한자자격 급수 2급 하나로 취업을 해서 6년을 일했고 대학교 때 졸업 기준을 맞추기 위해 토익 공부 잠깐 했던 것 외에 학원을 다녀본 적이 없다. 자격증에도 둔했고 없어도 일하는데 문제는 없었다. 그래서 이번에 토익 학원을 가는 내 모습 자체가 신기하다. 대학교 때도 안 다니던 학원을 이제야 오다니 말이다. 토익 스피킹 하나로 재취업의 당락이 결정될 것도 아니지만 지속적으로 텅 빈 자격증란으로 이력서를 내는 것이 마음에 걸렸다.


자격증은 퇴사 후 공백 기간을 채워줄 수 있는 한 줄이자 ‘자기 계발’로 대체될 수 있는 마지막 방패막 같은 키워드다. 토익이 아니라 토익 스피킹을 배우고자 한 것은 단순히 읽기만 하는 영어가 아니라 실제로 말할 수 있는 실용적인 공부를 하겠다는 마지막 자존심을 내세운 건지도 모르겠다. 해외여행 가서도 한 문장 말하기도 힘들어하니 지속적으로 하다 보면 나름 도움이 될 수도 있지 않을까 기대감으로 허전한 마음을 채운다.


최근에 지난 6년간의 직무와 관련해서 취준생들에게 도움이 될 만한 소개서를 작성할 기회가 생겼다. 업무를 수행하기 위해 준비해야 할 자격증, 공부할 내용이 무엇인가요에 묻는 질문에 노트북 모니터가 절전모드가 되었다. 내가 화장품 유통 판매직을 시작하면서 남들보다 더 낫다고 내세운 것은 자격증으로 설명할 수 없는 ‘의지’ 였기 때문이다.


실제로 일하면서 많은 신입사원들을 만났지만 자격증보다는 조직 적응력, 의사소통 능력, 책임감, 해보겠다는 적극성 있는 친구들이 영업 업무에 잘 맞았다. 오히려 스펙은 화려하더라도 고객과 의사소통이 어렵거나 일이 허접해서 생각한 것과 다르다고 퇴사한 경우가 많았다. 직무는 살펴보지 않고 자격증을 가지고 회사 기준을 따지다 보니 낭비하는 시간이 생기는 것이다.


많은 아르바이트 경력, 회사에 대한 정보도 부족했지만 나는 스펀지가 되겠다고 했다. 나는 마지막 임원 면접에서 어떤 업무를 배워도 다 흡수할 수 있는 순백의 스펀지라고 나를 표현했다. 그때 나에게 풍기는 에너지와 가능성에 대해 회사는 투자했다고 생각한다. 그 기대에 부흥하듯 6년을 일했고 직무를 수행하면서 부족함을 느끼지 못했다. 회사의 발전에 맞춰 나도 성장했고 성과를 보여주는 것으로 충분했다.


다시 새로운 시작점에 서서 지난 시간을 다시 살펴봤다. 나이 서른에 유통업계 6년이라는 경력은 든든할지 모르지만 예전의 에너지, 의욕은 없어 보였다. 이 의욕 없는 모습을 가리기 위해 자격증을 공부한다. 조금이나마 무기력한 모습을 감출 수 있지 않을까.


나를 포함해 어학원에 자신만의 꿈을 가지고 모인 사람들이 어떤 미래를 그리고 가고 있는지 궁금했고 그 과정이 실제로 필요한 것인지 의문이 들었다. 그럼에도 내가 학원을 다니는 것처럼 보이지 않는 기준에 나를 맞추기 위해 애쓰는 사람들이 모인다. 나는 알면서도 난생처음 토익 학원을 간다.


작가의 이전글 10년 묵은 때 벗기기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