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사 후 버킷리스트
2020년이 얼마 남지 않았다. 올해 5월 퇴사 후 아직 정해진 길이 없어서 끊임없이 방황하는 와중에 2021년이 한 달도 안 남아서 굉장히 조급한 마음이 든다. 올해 나의 ‘첫 퇴사’는 인생의 방향을 새로 잡는 중요한 시점이었다.
서른이라는 나이를 중심으로 지금까지 했던 일을 뒤로하고 내게 맞는 일과 해본 경험을 조합해 새로운 직장을 위한 도전이었다. 시작은 나름 용기 있는 선택이었지만, 정해진 길이 없는 상황에서 막막했다.
내가 내 길을 만들어 가야 하는 순간이 드디어 온 것이다. 지금까지 남들이 말하는 순서에 맞게 살아왔다면, 이제 그다음 길은 누구도 말해주지 않았다.
퇴사하면 내가 좋아하는 것, 하고 싶은 일들에 대한 아이디어가 샘솟을 것 같은 자신감이 있었다. 그동안 어지러웠던 생각도 정리하고 앞으로 나아가기 위한 멈춤,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
퇴사를 앞두고 버킷리스트를 적어보았다.
자전거 타기
한강 가서 샐러드, 점심 브런치 먹고 오기
독서
글쓰기 (에세이, 블로그 등)
아이패드 드로잉 배우기
운동, 다이어트
템플스테이
제주도 한 달 살아보기
적고 나서 보니 정말 소박한 리스트였다. 일하면서 휴일에 자전거 타는 게 유일한 취미였고, 독서나 운동 등 일하면서도 다 할 수 있었고 했던 일들인데 퇴사 후 버킷리스트가 되었다.
끊임없이 내 생각을 듣고 마음을 다잡고 싶었던 과정이 있었고, 억압되는 상황이 있었던 건 아니지만 자유롭게 내가 좋아하는 무언가를 다시 해보고 싶었다.
퇴직금이라는 여유를 통해 학원도 등록해서 영어, 글쓰기, 드로잉, 운동 다양한 분야를 체험했다. 앞으로 필요하지 않을까 싶었던 자격증, 해보고 싶은 취미, 특기, 소비 등 다양한 일을 직접 부딪혀보면서 나의 행복이 무엇인지 뒤돌아볼 수 있는 여유를 가지기 시작했다.
20대의 나는 일을 잘하기 위해 내 모든 시간을 쏟아부었다. 쉬는 날 업무 스트레스는 소비로 풀었고 그 외 모든 관심은 일과 관련된 것이었다. 따로 주말, 평일 나뉜 직업도 아니어서 항상 모든 신경이 일에 집중되어 있었다.
책을 읽을 때도 업무와 관련된 자기 계발, 프로세스를 만드는 과정을 고민해본다거나 연출물을 하나 더 제작해보는 등 다양하게 내가 할 수 있는 범위를 넓혀가면서 일했다. 업무스킬은 자연스럽게 성장하고 직장 내 경력이 쌓이면서 지위가 높아짐을 느꼈다. 동료들의 신뢰가 두터워질수록 스스로 잘하고 있다고 착각했다.
그 외 나만의 특별한 취미, 특기는 없었다. 내가 관심 있는 것들을 그때그때 단기적으로 경험은 해봤지만 한 가지에 지속적으로 몰두하는 것이 없었고 남들이 해보는 것들은 다해보자는 식이었다. 필라테스, 캘리그래피, PT, 중국어 등 개인적인 관심도 반영이 되었지만 스트레스가 해소되는 느낌보다는 잊지 위해 억지로 많은 걸 하고 있어 버거울 때가 많았다.
그렇게 6년 뒤 내가 좋아하는 것들에 대해 고찰하는 시간이 주어졌을 때 인생을 계획하는데 막막함이 너무 크게 느껴졌다. 어린 나이에 오랫동안 직장생활을 통해 해 본 것도 많았지만 딱히 한건 뭐였을까 답하기 어려웠다.
퇴사 후 버킷리스트를 다시 되짚어보면서, 내가 어떤 느낌과 감정으로 즐기는지 혹은 괴로워하는지 관찰하는 습관이 생겼다. 그러면서 하고 싶은 것은 뚜렷해지고 나만의 시간, 공간을 만들어가기 시작했다.
내 하루의 일과를 조금 특별하게 만드는 일이 뭘까 고민하면서 하루를 채워가고 있다. 그 특별함이란 거창하게 새로운 걸 배우거나 큰 사건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만족할 수 있는 무언가를 하루에 하나씩 꼭 하는 것이다.
내가 유일하게 본방을 챙겨보는 예능 프로그램인 [나 혼자 산다]에서 한 여배우의 하루를 그리면서 그들이 나누었던 이야기가 인상 깊었다.
30대의 나는 내가 뭘 좋아하는지
몰랐던 20대와는 다르다.
지금 나는 내가 좋아하는 것으로
하루를 채워가며 자존감을 높이려고 노력한다
20대의 나는 체력도 좋고 돈도 있었지만, 번 것 그 이상으로 많이 써서 돈은 항상 부족했고 모은 것도 없었다. 그동안 뭐에 돈을 썼는지 모를 정도로 명품백 하나 없는 지금 나에게 남은 건 없다.
20대 만의 즐거움과 열정이 있었지만 시간이 갈수록 나는 항상 허전했고, 공허했다. 한번 시작된 허무함은 점점 시간이 지날수록 풀리지 않는 답답함으로 커져 나를 여기까지 끌고 왔다.
본격적인 30대를 시작하는 지금, 나는 ‘나’에 대해 집중하고 있다. 초연결주의 시대에 더욱 외로워하고 주변인들과 접점을 찾지 못한 사람들은 ‘나’에 대해 궁금해하고 묻고 있다.
생산활동을 멈춘 하루하루가 즐겁고 생소하긴 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겁이 났던 지난 한주였다. 그래도 나에게 새로운 하루가 매일 주어지고 있고 내가 원한다면 시도해볼 수 있는 시간이 있다는 것에 문득 안도감을 느낀다.
내가 보여줄 수 있는 가능성이 무엇인지 만들어가는 이 시간이 결코 헛되지 않을 것이다. 오늘도 내가 제일 즐거운 순간이 한 가지라도 있었다면 그걸로 만족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