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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씀씀 Oct 16. 2020

10년 묵은 때 벗기기

내 공간을 만드는 일

퇴사 다음 날 밤에 디즈니 음악을 틀고 앤디 벽지 그림을 크레파스로 따라 그리며 완벽한 행복을 느꼈다.

퇴사하고 나서 내가 제일 먼저 계획한  내방 정리였다. 대학 졸업 이후 바로 취업하고 딱히 정리한 적 없으니 책상 위는 거대한 화장대였고, 옷장은 더 이상 옷을 걸 수 없어 의자에 입던 옷을 겹겹이 올려놓았다. 전체적으로 현재 상태는 방이라기보다 물건 보관함 같았고 나는 하루빨리 내 방에서 쓸모없는 물건을 덜어내고 싶었다. 방청소는 하루 만에 할 수 있는 양이 아니었다. 10년 묵은 때를 벗기기 위해서 버릴 것을 구별해내고 남은 공간을 재배치하고 다시 채우는 은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비우기

책상 위에서는 1L의 쓰레기가 두 봉지 나왔다. 유통기한 지난 화장품, 어렸을 때 썼던 스티커, 철 지난 수첩 등 어디서 이런 잡동사니를 돈 주고 사서 모았나 싶을 정도로 벅찬 쓰레기가 책상 서랍 속에서 튀어나왔다. 책상 선반에는 그리스 로마 신화, 해리포터, 소설 전집 등 버리지 못한 아기 때 서적이 먼지를 머금고 있었다. 책을 펼쳐보니 정말 깨끗했고 파헤치다 보니 대학 입학 신입생 설명회 팜플렛까지 발견했다. 쓰레기봉투를 채우면서 ‘그동안 책상 정리를 안 했구나.’ 느낄 수밖에 없었다.


나누기

방을 정리하다 보니 그냥 버리기 아까운 물건들이 많았다. 10년 동안 한 번도 쓰지 않은 것들이 갑자기 귀해지는 착각에 빠지기 시작한다. 나는 당근마켓 APP을 다운받았다. 내가 필요 없는 물건을 무료 나눔 하기 위해 깨끗한 어학서적, 물건을 업로드하니 10분도 안돼서 필요한 사람이 나타났다. 때 묻은 이것들도, 내 욕심에 쓰지도 않고 가지고 있던 것들이 누군가에게는 필요하다 생각하니 뿌듯하고 보람찼다.

구석에 버려놨던 디즈니 뱃지를 꺼내 전시했다. 살 때는 감동하며 샀던 것들인데 이제서야 빛을 본다

채우기

아이러니하게 새롭게 채워놓을 공간이 많지 않았다. 그동안 쓰레기를 머리에 이고 있던 것도 아닌데 생각보다 다시 공간을 재배치하기가 어려웠다.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디즈니 소품과 인형들을 모아 다시 배치하고 화장품을 줄였다. 벽에 가방을 걸 수 있는 행거를 이케아에서 사 와서 조립해 걸었고 침대 옆에 가습기를 놓을 수 있는 미니 선반도 놓았다. 책상 밑에 구겨져있던 가방들을 펴서 걸었고 책상 위에는 책을 추가로 넣을 수 있는 선반을 올려놓았다. 물건을 잘 둘 수 있는 소품을 몇 개 채우니 이제 조금 방처럼 보인다.

벽에 내가 좋아하는 그림을 걸어놨다. 다이소에서 5,000원 주고 산 벽걸이다. 고가의 미술작품보다 나는 이런게 좋다.

내가 있는 공간은  

방 정리는 한 번에 하지 못했고 한 달에 걸쳐 조금씩 나누어 진행했다. 퇴사 후 방 정리를 제일 먼저 계획했던 이유도 그동안 정리하지 못한 마음을 추스르고 새롭게 다시 시작하고 싶은 마음 때문이었다. 많이 버리고 다시 채우는 일을 한 달 동안 반복하다 보니 10년이라는 시간 동안 나를  방의 모습처럼 방치하고 있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동안 나는 방에서 잠자고 잠시 화장하고 다른 일? 시간을 보내는 일이 거의 없었다. 정작 내 방에서 내가 나를 위해 보낸 시간은 없었다.


방을 새롭게 꾸미고 나니 내가 좋아하는 것과 필요한 들이 보였다. 지금까지 어지러웠던 나의 방은 10년이라는 시간 속에 정리되지 않은 나를 보여주는  같았다. 나의 취향을 새겨 넣고 내방 곳곳을 새롭게 꾸며보니 ‘나’를 정리한 것 같아 마음이 편해졌다. 나에게 혼란스러웠던 나의 모습을 정리하고 내가 만들고 싶은 모습으로 방을 꾸며보는 일은 단순한 기분전환보다 더 큰 변화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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