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섯 번째 면접
나는 면접 자리에서 철저하게 을이었다. 면접자에게 최대한 웃음을 지으면 나의 가치에 대해 어필했고, 10페이지에 달하는 포트폴리오를 각각 뽑아 자기소개를 했다. 하지만 나의 페이스에 맞추지 않고 자신들이 원하는 대로 페이지를 넘기면서 갈 곳 잃은 손짓, 눈짓으로 나를 바라봤다.
정성스럽게 준비한 자기소개를 마치고 질문 시간이 이어지기 시작했다. 지금까지 내가 했던 말들은 다 듣지 않았는지 본인들이 준비된 스크립트에서 필요한 질문을 하기 시작했다.
자기소개하면서 설명했던 내용임에도 다시 여러 번 질문이 반복되었고, 처음 내 소개는 듣지 않은 것 같았다.
면접관은 나랑 나이가 비슷했고 스타트업이라 그런지 복장도 굉장히 편안해 보였다. 정장을 입고 간 내가 유별나 보일만큼 파격적인 의상이다. 점차 서로 대화를 주고받으면서 무게를 잡기 시작하더니 중간중간 반말을 섞기 시작했다. ‘음~그렇지 그렇지. 맞아 맞아’ 상대방의 말투에서 나는 일방적인 대화에 이끌려 비위를 맞추는 듯한 느낌도 들었다.
나의 전 직장을 두고 내가 갑 입장이었기 때문에 브랜드, 제조사의 을이 되어 일할 수 있냐는 질문을 받았다. 직무상 유통 채널을 넓혀야 하는 브랜드사 입장에서는 물건 진열, 입점을 위해 을이 되기도 하겠지만 갑, 을 문제는 아니라고 본다. 좋은 물건, 고객이 원하는 물건이라면 입점을 원하는 경우도 있고 주고받는 관계에서 갑, 을 논리로만 설명하기에는 많은 변수가 있지 않은가.
이미 을로 자신들을 인식했으니, 시장의 주체자가 되어 일할 포부는 없어 보였다.
갑자기 면접의 주제는 갑, 을 관계에서 브랜드를 어떻게 이끌고 갈 것인가에 대해 초점이 맞춰져 흐르기 시작했다. 회사 조직원으로 일해본 적이 없기 때문에 그들이 필요로 하는 문제 해결점이 뭔지 정확하게 알 수 없지만 실무에 대한 내 생각을 요구하며 압박 질문을 던졌다.
나는 현재 그 결정을 내리기 위해 고려되어야 할 사항들에 대해서 알지 못하기 때문에 명확하게 답을 못하겠지만 어떤 조건이 필요한지 살펴보겠다고 말했다. 하지만 그 질문이 답답하게 여겨진다며, 그냥 단순히 계산기 두드려보면 되는 문제니 답을 해보라고 재촉했다.
나는 답을 하지 못했다. 단순한 계산임에도 판단 기준이 모호했고 당황한 나머지 사고 회전이 멈춘듯했다. 이 자리가 너무 민망하고 지금이라고 포기하고 면접장을 뛰쳐나가고 싶다는 충동이 일어날 정도였다.
일하면서 갑, 을 관계가 민망하다던 그들은 어느새 갑이 되어 무게 잡고 나를 압박하고 있었다. 면접 본 후 나는 ‘갑, 을’ 단어가 머릿속에 맴돌았고 우위에서 날 내려다보는 그들의 태도가 생각나 불쾌했다.
홀로 들어가는 다대일 면접장에서 이처럼 민망하고 분한 순간들이 많다. 내가 구직자라는 이유만으로도 이미 갑, 을 관계가 정해져 있는 상황에서 내 의견을 정확하게 전달하기 어렵다.
답을 못하는 상황에서 쩔쩔매는 모습을 유도한 건지는 모르겠지만 이때 나의 부족함을 탓하기보다는 사람을 평가하는 기준이 잘못되었음을 인식하고 빨리 털어내는 멘탈 연습이 필요하다.
나를 압박하는 상황에서 적당히 기분 나쁜 것도 숨기고 조직에 문제없이 적응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줄 필요도 있다. 하지만 항상 할 말도 제대로 못 하고 무작정 상사에게 순종하는 것만 바라는 조직에서 내가 즐겁게 일할 수 있을까.
수많은 면접자들이 현장에서 깨지는 상황을 떠올렸다. 이런 당황스러운 상황을 겪고 홀로 내 탓하며 집으로 돌아갈 수많은 구직자들에게 갑이 아무렇지 않게 휘두른 폭력을 말이다.
그런 갑을 관계에 굴하지 않고 오히려 내가 꼭 필요한 사람이 될 수 있도록 자신을 더욱 계발하고 나아가는 계기로 삼는 과정 중에 하나임을 말하고 싶다. 필요하다면 먼저 손을 내밀 수밖에 없게 내가 잘하는 것을 더욱 살리고 항상 keepgoing 하리라. 주먹을 꽉 움켜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