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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여민 Mar 27. 2024

홍 부장님! 책 사이에 봉투는 뭐예요?

썩은 내가 진동했던 위스키 글렌피딕


정부 및 공공기관은 제작, 구매, 공사, 용역 등을 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조달청에서 운영하는 '나라장터'라는 국가종합전자조달을 이용해야 한다.

하지만 '나라장터'가 생긴 2002년 전에는 공공기관 자체적으로 외부업체와 수의계약을 하거나 예산규모가 클 경우 서면 입찰방식을 활용했다.


내가 맡은 업무인 교육용 교재 제작은 대상자별 종류도 다양했고, 발간부수도 연간 100만 부 이상의 큰 예산이었기 때문에 입찰 공고를 했다.


앞편에서 쓴 내용처럼 교재 제작 후 인쇄소에서는 납품 전 교재 서너 권과 포장된 형태 한 박스를 가져와 감사실에서 검수를 받는다.

어느 날 감사실 검수 후 인쇄소 홍 부장이 교재 한 권을 슬며시 책상 위에 놓고 나가는데 느낌이 싸했다.

아니나 다를까 교재 사이에 하얀 봉투가 하나 껴있었다. 빼꼼히 봉투를 열어보니 만 원짜리 장, 10만 원이 들어 있다.

급하게 나가는 인쇄소 홍 부장을 불렀다. 

"아 아 아저씨, 아니 홍 부장님! 책 사이에 봉투는 뭐예요?"

30여 명 되는 사무실 직원들이 일제히 우리 쪽을 쳐다봤다.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른 홍 부장은 다시 봉투를 호주머니에 찔러 넣고 허겁지겁 저 멀리 사라졌다.


일주일 정도 정도 지났을까?

부장님이 부서 회식을 하자며 장소는 선릉역 근처란다.

'멀리도 가네.'


선릉역 근처 고급 일식집에 들어서자 홍 부장과 인쇄소 사장이 미리 와 있었다.

테이블 위에는 위스키 글렌피딕과 맥주병들이 세팅됐다.

몇 년 산인지 기억은 안 난다.

그때는 왜 그렇게 비싼 양주에 맥주를 섞은 폭탄주를 마셨는지 모르겠다.

전에 한번 마셔봤던 달달한 바닐라 향의 글렌피딕이 이날은 시궁창 내가 진동하는 것 같았다.


테이블 끝자리에 앉아 먹는 둥 마는 둥 회식을 마치고 나왔는데 인쇄소 홍 부장이 모범택시 문을 열어줬다.

택시에 오르자 떠나려는 기사에게 몇만 원을 쥐어주며 잘 모시라고 신신당부한다.

사이드미러를 보니 일행들은 어깨동무를 하고 뒷골목으로 향했다.


더러운 마음으로 집에 와 민상선배에게 전화를 했다.

"그 인간들 아직도 그래?"


그 당시 입찰은 말이 입찰이지 무슨무슨 협동조합과 연간 단가계약을 하고, 우리 기관이 인쇄 공고 후 제일 먼저 입찰하는 업체가 낙찰받는 시스템이었다. 

그러니까 업체에서는 입찰공고 정보를 미리 받으려고 혈안이 되고, 다음 계약을 선점하기 위해 기관 담당자에게 접대를 하고, 돈봉투를 뿌리며 소위 꿀을 바르는 것이다.  


지금은 상상도 못 할 이런 행태는 일명 김영란법이라고 불리는 '청탁금지법'이 없던 1990년대 일이다.


말단인 내게 10만 원짜리 봉투를 줬으니 내 위는, 더 위는? 

그 이후에도 인쇄업체는 몇 번이나 내게 시도를 했지만 만만치 않았는지 잠잠해졌다.

하지만 눈치를 못 챈 몇 업체는 납품을 하며 빵 사 먹으라고 슬쩍 봉투를 줬지만 나는 곧 매점에서 '갈아 만든 배'나 '비락식혜'를 몇십 상자 사서 배달온 트럭에 실어버렸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선릉역 뒷골목으로 사라졌던 부장과 송 대리는 그날  2차 룸살롱에서 접대부들과 광란의 밤을 보냈다고 한다.

그걸 자랑하던 송 대리에게 거부 못하는 쾌락과 희희낙락으로 언젠가는 분명 다칠 것이라고 일침을 놨지만 그는 콧방귀를 뀌었다.

결국 몇 년 후 부장은 업체 장부에 올라간 접대 명단에 발목이 잡혀 해임됐고, 송 대리도 업체에서 받은 돈을 ATM기에 입금하다가 국무조정실 공직복무점검단 특별감찰에서 발각, 파면됐다.


원래도 그랬지만 그때부터 나의 좌우명은 콩글리시 'in my pocket(인 마이 포켓)만 하지 말자!'이다.

<증일아함경>에 "욕심은 예리한 칼날에 바른 꿀과 같고 쓰레기 더미에 아름다운 꽃이 피듯 겉으로는 그럴듯하게 보이지만 그 허망함이 물거품과 다를 바가 없다."라고 한다.


어쩜 그날 마신 위스키 글렌피딕이 달콤했고, 혀끝에 여운이 지속됐다면 아마 나는 30년 이상 이 직장을 다니지 못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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