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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여민 Apr 03. 2024

만삭이니까 애 낳을 때까지 도서관에서 근무하렴.


그러길래 누가 시키래?

다음 달 아기를 낳는 정 대리가 만삭의 몸으로 계단을 오르내리는 걸 보니 기특하면서도 28년 전 내 모습도 생각난다.

당시 근무하던 사무실은 엘리베이터가 없어서 5층까지 걸어 다녔다.

출근길에 양수가 터져서 애를 낳으러 갔기 때문에 막달까지 남산만 한 배를 내밀고 다녔다.

그렇다고 임산부에 대한 배려 따위는 없었다.

사무실 책상에 앉아 줄 담배를 연신 피워대고, 손님이 오면 "여기 다방커피 두 잔!"도 서슴없이 주문했다.


어느 날은 부장이 카드를 한 장 주며 은행에 가서 10만 원만 뽑아오라고 시켰다.

난간을 잡고 쉬엄쉬엄 1층까지 내려가 건물 밖으로 나가 앞 건물 은행 ATM기에서 10만 원을 인출하고 영수증을 챙겨 부장한테 가져다줬다.

"야! 만이천 원? 이거 뭐야?"

‘?’


사실 왜 저렇게 소리를 지르는지 영문을 몰랐다.

알고 보니 계좌 인출을 했어야 하는데 현금서비스, 즉 단기카드대출을 받아 수수료가 만이천 원인 것이다.

'몰랐지... 그러니까 누가 시키래?' 속으로만 억울해했다.

다행인 건 그 일 이후 다시는 내게 은행 심부름 따위는 시키지 않았다.


그날 저녁 남편한테 회사에서의 일을 말했더니 팔딱팔딱 뛰고 난리도 아니었다.

어떻게 임산부한테 개인 심부름을 시키냐, 내일 당신 회사에 쳐들어가 가만 안 놔두겠다.

민간회사에 다니는 남편은 이해 못 할 상황이었겠지.

흥분하는 남편을 보며 난 조용히 다짐했다. 앞으로 절대 회사 일은 집에 말하지 않으리라.



쿠션은 벗겨서 빠는구나.

"여민아. 나 휴가 다녀올 테니 그동안 부장님들 책상 의자에 있는 쿠션 좀 빨아놔."

황 언니는 그러곤 휴가를 갔다.


'지도 애 낳아 봤으면서 만삭한테 시키다 시키다 별 걸 다 시키네. 아 짜증 나!'


자존심 때문에 남들 앞에서 빨래하는 모습은 보이기 싫었다. ‘체육의 날’ 다들 오전 근무만 하고 퇴근한 틈을 타 화장실에서 쿠션에 비누칠을 하고 열심히 빨아 베란다에 널고 집에 갔다.

'봄바람에 해가 쨍쨍하니 금방 마르겠군.'


며칠 후 휴가를 다녀온 황언니가 베란다로 나와 보라고 호출을 했다.

"넌 도대체 집에서 뭘 배웠니? 기본도 몰라?"

'저 언니는 엄마가 쿠션 빠는 법도 가르쳐줬나?'


하긴 지금 생각해 보니 내가 한심하긴 했다.

쿠션커버만 벗겨서 빨아야 하는데 솜이 든 채 통째로 빤 것이다.

매일 베란다에 나가 빨래가 얼마나 말랐나 손을 대봤다.

한 달이 지나니 시큼한 냄새가 나서 부장님들 쿠션은 쓰레기통으로 직행했다.

나도 곱게 자랐다. 사업이 잘 된 아버지 덕분에 어렸을 때부터 집에 일하는 도우미 이모가 계셨기 때문이다. 뭐 어떡하랴. 이러면서 하나씩 배우는 거지.  


퇴근 후 곧 태어날 아이를 위해 베갯잇에 수를 놨다.



배려해 주는 거야. 만삭이니까 애 낳을 때까지 도서관에서 근무하렴.

 "여민 씨. 오해하지 말고 들어. 이사님이 좀 불편하시다고 애 낳을 때까지 당분간 2층 도서실에서 근무하라시는데... 다 여민 씨 배려해서 하시는 말씀이니까 절대 오해하지 말고..."

이사실에서 아침 회의를 마치고 온 과장이 말했다.

"네?"


아침마다 열리는 이사 회의 때 커피를 타 갔는데, 쟁반을 들고 만삭의 몸으로 뒤뚱거리며 들어오는 모습이 보기 싫다는 뜻이다.

진정한 배려는 본인들 손으로 직접 타 마시는 것 아닌가?


"제 사무실은 여기니까 전 이곳이 편합니다."

말은 저렇게 당돌하게 했지만 화장실에서 한참 울고 나왔다.



띠리리 띠리릭~

"지금 올린 기안 관련해서 물어볼 게 있는데, 정 대리 자리에 없나요?"

"본부장님. 정 대리 단축근무라 4시에 퇴근했습니다."


아 그렇지.

요즘은 '임신기 근로시간 단축제'라고 임신 중인 여성직원은 하루 2시간까지 단축근무가 가능하다.

참 좋은 세상이고 또 부럽다.

하지만 살기 급박한 현실이니, 또 다른 말 못 할 어려움도 있을 것이다.


“아들~ 생일 축하해. 미미고 미역국이라도 끓여 먹어."

"오늘 내 생일이에요?"

"응. 음력 2월 24일이잖아. 낮 12시 55분에 태어났어."

"엄마는 참... 요즘 세상에 누가 음력까지 챙겨요."


나도 늙었나 보다. 음력을 운운하는 거 보니...

창 밖에 팝콘 같은 벚꽃이 흐드러지게 폈다.

28년 전 양수가 터져 병원 가는 길에는 노란 개나리가 지천이었는데, 세월 참 빠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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