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여민 Mar 20. 2024

오류인가 부적인가?

베스트셀러 작가가 되다



"감사실입니다. 인쇄 검수 때문에 그러는데 좀 내려오시겠어요?"


교재를 제작하면 인쇄소에서 납품 전 납품할 책 한 박스와 서너 권의 책을 가져와 감사실의 검수를 받는다.

가장 떨리는 순간이다.

쪼르륵 감사실에 내려갔더니 믿지 못할 광경이 눈앞에 펼쳐졌다.


"도대체 이게 뭡니까? 교회 다녀요? 절 다녀요? 이 방패는 또 뭐야!"

감사관은 책자를 펼치며 다그쳤다.



내가 근무하는 교육용 교재 제작부서는 공공기관 특성상 가끔 외부기관에서 의뢰하는 책자를 만들기도 한다.

모 지방경찰청으로부터 교통경찰관용 <도로교통법 위반 단속 지침서> 제작 의뢰가 들어왔다.

경찰관들이 도로에서 교통법규 위반 운전자 단속 시 "선생님께서는 도로교통법 제5조 신호지시 위반으로 벌점 15점과 범칙금 6만 원이 부과됩니다."라고 고지하기 위해 '위반사항 - 적용법조 - 벌점 - 범칙금'과 단속 주의사항을 간단명료하게 제작하는 작업이었다.

교통경찰관 제복 앞주머니에 들어갈만한 크기의 수첩형으로, 제작 부수는 1만 부였다.

원하는 조건은 경찰청에서 지정하는 인쇄소에서 제작해야만 했다.

직접 원고를 작성하고 조판, 수십 번 교정 후 마지막으로 인쇄소에 나가 필름까지 확인하고 납품만 기다린 상태였다.


그런데 수첩 중간중간 卍, ॐ, ✝ 등 알 수 없는 기호들이 박혀 있었다.

'분명 인쇄소에서 한 장 한 장 넘기며 확인했는데 먼지도 아니고 뭐지?'

수첩을 들고 온 인쇄소 부장님을 쳐다봤다. 내 시선을 피하고 고개만 저을 뿐이다.


"이게 뭐냐고요? 인쇄하면서 오류 난 거 아니에요? 부적이에요?" 감사관은 계속 다그쳤다.

"좀 알아보고 다시 올게요."

인쇄소 부장님을 복도로 데리고 나가 자초지종을 물었다.

"저희는 몰라요. 경찰청에서 인쇄소로 나와서..."


경찰청 담당 김경위한테 전화를 했다.

사연즉슨 도로에서 단속하다가 순직하는 교통외근경찰관이 너무 많아 윗선에서 사고 예방을 위해 단속지침서에 저런 문양을 넣으라는 지시가 있었다는 이유였다.

'부적 맞네...'


어이가 없고 헛웃음도 나왔지만 우선 급한 불부터 꺼야 하니까 그 사유를 공문으로 보내달라고 했다.

하지만 김경위는 완강했다.

"그걸 어떻게 문서로 남겨요. 난 못해요."

"전 어떻게 해요? 감사실에서는 난리인데... 그럼 저 징계받아요."

"저희 과장님(총경)이 감사실로 전화드릴게요."



다행인지 이 사건은 그렇게 일단락되었다.

1만 부를 해당 경찰청에 무사히 납품하고 모처럼 휴식을 취하려는데 전화통에 불이 났다.

따르릉~ 따르릉~

"여기 동부경찰서요. 그 수첩 우리도 좀 주이소."

"남부경찰서요. 아따 그거 좋소. 나도 좀 씁시다."


결국 당초 의뢰했던 모 경찰청의 허락 하에 추가로 2만 부를 제작해 전국 경찰서에 배부했다.

물론 김경위에게 인쇄 재판본엔 알 수 없는 기호를 빼면 안 되냐고 물었다.

"여민 씨. 그것 때문에 달라는 경찰들이 얼마나 많은데요!"


단속 과정에서 도로교통법 적용을 둘러싸고 운전자와 단속경찰 사이에서 생기기 쉬운 시비를 없애고 법 적용의 통일성을 높였다고 여기저기에서 칭찬이 자자했다.


난 책 3만 부를 완판 한 베스트셀러 작가가 되었고, 그 해 연말 대한민국 경찰청장 표창을 받았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