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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여민 Mar 13. 2024

직장동료들과 평생 이어진 지란지교


흔히 사회에서 만난 관계는 한계가 있다고 한다.

내게는 30년 넘게 이어져온 다섯 명의 직장동료들이 지금까지 이 자리를 굳건하게 지킬 수 있게 해 준 정신적 지주다. 아마 그녀들이 없었다면 분명 나는 기댈 곳이 없어 중도 퇴사했을 것이다.

나보다 한 두해 늦게 입사한 그녀들과는 결혼부터 출산, 애들이 학교에 들어가는 것까지 형제자매만큼 가장 가까이 지켜봤고 지금도 현재진행형이다.


지금 우리 회사에는 그녀들 중 단 한 명도 남아 있지 않다.

네 명은 1997년부터 휘몰아쳤던 IMF사태 때 강제 구조조정으로 퇴사당했고, 한 명은 내가 중매했는데 아이 첫 돌 때 이혼하며 자발적 퇴사했다.

지금이야 몇 집 건너 한 집일 정도로 이혼이 흔하지만 과거에는 사회적 인식 때문에 이혼녀 딱지를 달고 직장 다니기가 쉽지는 않았다. 특히 공공기관은 더했다.

S가 이혼하던 날 우리 여섯 명은 교대역 앞 곱창집에서 소주를 진탕 마시고 취해 주황색 앞치마를 맨 채 그대로 지하철 2호선을 타기도 했다. 


여자 형제가 없는 내게 그녀들은 친구 같고, 언니 같고, 동생 같은 존재였다.

근무부서는 모두 달랐지만 구내식당에서 점심을 먹고 매일 모여 앉아 수다를 떠는 게 워킹맘으로서 가장 행복한 순간이었다. 

그런 그녀들이 타의적, 자의적으로 회사를 그만두고 나 혼자 남았을 때의 상실감은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 

그 헛헛함을 덜어내고자 아마 그때부터 더욱 업무에 매진하고 미친 듯이 일했던 것 같다.


그녀들이 퇴사 후에도 우리 여섯 명은 애들을 데리고 거의 매주 만났다.

한창 일할 나이인 30대의 남편들은 바빴으니까...

제일 먼저 운전을 시작한 나와 S의 차를 타고 태안 꽃지해수욕장, 포천 산정호수, 공주 공산성 등 전국을 쏘다녔다. 무슨 깡이었는지 중증급성호흡기증후군인 사스(SARS)가 창궐했던 때 사이판도 갔었다.

우리의 애들은 자연스럽게 형제처럼 어울려 지냈고, 지금은 다 커서 대학을 졸업한 아이도 있고 올해 결혼을 하는 아이도 있다.


우리 집 애 봐주던 이모님이 갑자기 못 올 때마다 경기도 구리에서 아침 일찍 회사 앞으로 와 애를 픽업해 집으로 데리고 가서 하루종일 봐줬던 S.

유치원이 문을 닫은 여름방학 때는 출퇴근하며 가사도우미처럼 집안일은 물론 우렁각시처럼 냉동고 가득 만두까지 빚어줬던 Y언니.

고등학교 졸업이 컴플렉스라 딸들만은 남부럽지 않게 좋은 대학을 보내겠다는 일념으로 애 둘을 데리고 필리핀, 호주 등으로 단기 어학연수 갈 때마다 10년 동안 우리 애를 달고 가줬던 J언니.  

일하느라 백화점이나 마트를 못 가는 나를 위해 대신 쇼핑해 주던 자발적 코디네이터 K.

라보 영어교실, 발도르프 놀이학교, 싸이더스 스포츠아카데미 등 영어부터 체육까지 섭렵해 한시도 쉬지 않고 우리를 끌고 다녔던 H.


그녀들은 첫 직장에 대한 애정이 큰 만큼, 그런 회사에 나를 투영시켜 아직 남아 있는 내가 늘 잘되기를 응원해 준다. 아직 회사에서 잘리지 않고 자리에 것은 회사동료로 만났지만 30년 동안 변치 않은 사랑과 온갖 기를 북돋아준 덕분이다.

우리의 꿈은 고위직(ㅋ)인 내가 정년퇴직하면 집을 지어 다 함께 사는 것이다.

그녀들이 변치 않게 나를 자랑스러워하도록 더 열심히 일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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