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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여민 Apr 17. 2024

여기가 니나놋집입니까?


우리 기관은 1년에 한 번 국무총리, 행정안전부장관까지 참석하는 대대적인 행사가 있다.

정부부처 주요 외빈과 참석자가 1천 명이 넘다 보니 행사하기 몇 달 전부터 전 직원에게 각자 임무가 부여된다.

누구는 VIP 의전, 누구는 동쪽 엘리베이터 안내, 누구는 기념품 배부 등...

지금은 서울 삼성동 코엑스에서 열지만, 2000년대 초반까지는 세종문화회관에서 개최했다.


출장비와 별도로 행사 전날 점심 식대로 남성직원들에게는 1만 원을, 여성직원들에게는 3만 원이 지급됐다.

여성직원들에게 2만 원을 더 주는 이유는 미용실에서 머리 올리는 값이었다. 머리 올리는 값?

그렇다. 행사 동원인력의 복장이 남성직원들은 양복, 여성직원들은 한복이었기 때문이다.

한복에 어울리는 단정한 올림머리를 하기 위한 일종의 드라이 값이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코미디 같은 광경인데, 통일된 맞춤 한복이 아니라 각자 본인 것을 입던지, 알아서 친척 등에게 빌려 입고 가야 했다. 요즘은 한복 대여점을 손쉽게 찾을 수 있지만, 그 시절엔 언감생심이었다.

따라서 대부분 결혼할 맞췄던 한복을 입고 왔으니 가지각색이었다. 색동저고리, 단삼, 당의, 활옷까지 아주 다양했다. 

나는 결혼할 때 시어머니가 일반적인 한복 외 개량한복을 별도로 맞춰주셔서 고무신 대신 구두를 신고 개량한복을 입고 갔다. 

문제는 2만 원이나 더 주며 올림머리를 하라고 했으나 미용실 가는 게 아까워 각자 머리를 묶거나 풀어헤친 머리로 온 직원들이 대부분이었다.

행사는 오후 2시였지만 오전 7시부터 예행연습을 해야 하므로 총천연색 한복을 입고 세종문화회관 앞 계단에 앉아 있던 우리의 모습이 시민들에게 어떻게 비쳤을까?


한 번은 예행연습 후 짬이 난 시간에 얼른 점심을 먹고 오라길래 대학 때부터 종종 가던 <광화문 미진>에 메밀국수를 먹으러 갔다. 당연히 한복을 입은 채로...

대여섯 명의 여자들이 한복을 입고 식당에 들어서니 사람들 이목이 집중됐다.  


"혹시 여민이 아니니?"

아뿔싸! 하필이면 식당에서 대학 동기를 만났다.

"너 공공기관 다닌다고 들었는데, 무슨 드라마 찍어?"


창피했다. 그리고 짜증 났다. 

냉메밀국수를 먹는 둥 마는 둥 하고 세종문화회관 집결 장소로 가서 홍보부장한테 소리쳤다.

"부장님! 여기가 니나놋집입니까? 왜 여직원만 한복을 입어야 합니까? 우리도 정장을 입게 해 주던지, 요즘은 의전이나 행사 도우미라는 것도 있다는데 그거 활용하시면 안 돼요? 이게 뭡니까?"


여기저기에서 환호소리가 들려왔다. 여성직원들보다 남성직원들 박수소리가 더 컸다.

다행히 그다음 해부터 우리는 더 이상 한복을 입지 않아도 됐다. 대신 깔끔한 정장의 행사 도우미들이 우리의 자리를 대신했다. 

난 그 사이 행사 총괄 담당자를 몇 년 해봤고, 행사 때마다 후배들에게 뻐기면서 거들먹거리기도 했다.  

"너희들 내 덕분에 한복 안 입는 거야!"


어느새 올해로써 그 행사가 44주년이나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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