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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여민 Apr 24. 2024

저도 전라도 사람입니다.

"전주 이가입니다."


지금은 많이 가라앉았지만 우리나라의 뿌리 깊은 영호남 지역감정은 정치계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당연히 정부 산하기관인 공공기관도 누가 대통령이 되느냐에 따라 기관장 출신 지역도 달라졌다.


출생지와 연고지가 다를 수 있지만 우리나라 정서상 나는 서울에서 나고 자랐지만 아버지 고향도 내 고향, 어머니 고향도 내 고향으로 인식하는 경우가 많았다.

과거 지역주의가 만연하던 시절, 취업할 때 전라도 출신이면 불리한 경우가 많아 자신의 고향을 숨기고 서울이나 경기 등 다른 지역을 자기 고향이라고 말하는, 일명 '고향 세탁'도 있었다.


내가 다니는 공공기관도 과거 영남 쪽 대통령 시절에는 부장, 이사, 기관장까지 대부분 고향이 대구나 부산 출신이었다. 아니 호적등본(지금은 가족관계등록부)을 떼보지 않았기 때문에 그게 맞는지도 모른다. 더더군다나 부모님은 경기도, 난 서울사람이라 표준어를 쓰는 경상도와 전라도 사람 구분을 못했을 수도 있다.

 

그러던 어느 해부터 아주 신기한 경험을 했다.

대한민국 제15대 대통령으로 호남 출신의 김대중 대통령이 당선된 90년대 말부터 기관장은 물론 본부장, 국장, 부장 등 아래까지 줄줄이 물갈이되었다.

그동안 지역 차별로 받은 불이익의 울분이 봇물처럼 터진 것인지, 이번 기회에 싹 갈아치우자는 마음이었는지 그렇게 보직자들이 바뀌는 건 직장생활 30여 년 동안 그때가 제일이었던 것 같다.


직속 본부장으로 나주 출신 이사가 취임했다.

부서별 업무보고를 하고, 새 본부장을 모시고 회식을 했다.


술이 어느 정도 들어가 얼굴이 벌게진 김 부장님이 걸쭉한 전라도 사투리로 소리를 쳤다.

"이사님! 제가 육사 출신인데 대령도 못 달고 중령에서 옷 벗고 왜 여기와 있는 줄 아십니까?

 그 이유가 뭔지 아시냐고요. 그게 다 제가 전라도 사람이라 그런 겁니다."  


'잉? 부장님 서울사람 아니었어?'


서로 눈치를 보던 직원들도 김 부장님의 한마디에 여기저기에서 '나는 광주, 나는 고흥, 나는 여수' 등 고향 커밍아웃을 했다.

거의 막내 축에 들던 나는 조용히 듣고 있다가 한마디 하라고 해서 "배는 나주배가 맛있죠."라며 나름 용비어천가를 했다.


껄껄 웃던 이사님이 "이 양은 고향이 어딘가?"라고 물었다. 

"네! 저도 전라도 사람입니다. 전주 이가입니다."


때로는 실력보다 임기응변이 더 요긴할 때가 있다.

주요 보직자들은 제17대 대통령 취임과 함께 '영포라인'으로 또 한번 대대적으로 물갈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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