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 상황을 직시해 보자.
현 상황을 직시해 보자.
어느 날 인터넷에 쓴 글을 보았다며 낯선 이에게 쪽지가 왔다.
여민 님 안녕하세요?
요 며칠 잠도 제대로 못 잘 정도로 고민이 많아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심정에 연락드리게 되었습니다. 제 상황을 설명드리자면...
이렇게 편지는 시작되었다.
요지는 공공기관에 다니는 마흔 살 후반쯤 되는 여직원이 직장생활을 하며 무심한 CEO와 무능력한 팀장, 그리고 동료와의 갈등을 어떻게 대처할지에 대한 고민 상담이었다.
그녀가 볼까 봐 자세히 쓸 수는 없지만 고민은 세 가지였다.
- 어떻게 이 상황을 헤쳐 나가야 지혜로운 사람이 될까?
- 회사를 그만두거나 다니거나 49:51 상황인데, 나의 결정은?
- 나이스하게 들이받는 방법은 무엇일까?
술자리에서 우리 회사 후배들에게 개떡 같은 조언은 많이 해봤지만 이렇게 얼굴도 모르는 이에게 어떻게 말해줘야 할지 걱정이 들었다.
하지만 나도 이렇게 터놓고 얘기할만한 여성 선배가 있었다면 더 크게 성장할 수 있었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컸던지라 메일로 ‘나라면...'하고 답장을 썼다.
안녕하세요? 경아 님! 고민이 많으시네요.
편지를 읽다 보니 예전 저의 모습을 보는 것 같아 안타깝고 화도 납니다.
우선 제가 파악한 각자의 상태를 한번 적어 보았어요.
<경아 님>
46세, 평직원(몇 년 전 자발적으로 보직 해제), 부서 선임, 창립 멤버.
다양한 업무 경험, 부서마다 다니면서 해결사 역할.
보직 시 환경 열악했지만 부서원들과 원만한 관계.
승진 두 번 누락됨. 이번에도 안 될 것 같아 걱정.
무능한 현 팀장 대신 실질적 팀장 역할 대신 중.
# (조언) 나만 생각해 보기
<CEO>
퇴직공무원 출신, 올해 임기 만료.
남성직원 눈치 많이 보고, 만만한 여성 무시.
소통 잘하고 적극적 업무 추진과 갑질 안 하는 사람 선호.
경아 님에게 2년 간 사업팀장 등 보직을 권유하지만 승진은 안 시키겠다는 조건.
# (조언) 안정을 추구하는 스타일 같음.
<현 팀장>
무능하고 부서 존치 여부 문제까지 야기시키는 인물.
일도 안 하고, CEO도 경멸함.
# (조언) 화가 나지만 상사임.
<동료>
갑질 등으로 CEO 눈 밖에 나서 한직에서 근무 중.
이번 인사 때 CEO가 미안한 마음으로 경아 님 대신 승진 시켜줄 것 같음(추측).
같은 부서가 아니라 일을 잘하는지, 못하는지는 잘 모르겠음.
#(조언) 내가 신경 쓸 영역 밖.
<인사팀장>
CEO의 의사를 대신해서 경아 님에게 전달.
경아 님이 CEO와 직접 대면해서 인사 문제를 의논할 기회를 안 줌.
# (조언) 믿을 만한 인물? CEO 의견 그대로 전달하는지 확인 필요.
그리고 경아 님의 고민은 크게 #들이받고 싶다, #정당하게 승진 요구하고 싶다, #자존심 상해서 퇴사하고 싶다. 이 세 가지 같고 그걸 풀어보면 다음과 같겠지요.
첫째, 허수아비 팀장 대신 2년간 일했으나 승진에서 세 번이나 누락돼 감정 컨트롤이 어렵다. 나이스하게 들이받는 방법은 없을까?
둘째, 누구보다 나의 힘듦을 잘 알 것 같은 CEO에게 현명하게 보상을 요구할 방법은 무엇일까? 그러나 승진 요청을 하면 한직으로 발령낼 것 같아 두렵다.
셋째, 이런 대우받으며 참고 계속 다녀야 할지(51%), 퇴사할지(49%) 고민이다. 이용만 당하다 버려지는 느낌이며, 자존심이 상했다.
메일로만 봤을 때 경아 님은 일 욕심도 많고, 업무 능력도 뛰어나고, 대인 관계도 원만하기 때문에 스스로 타인들이 나를 인정해 줄 것이라고 믿고, 당연히 그렇게 해줘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 같아요.
물론 이건 아주 당연한 거죠. 일하는 사람한테 보상이 주어지는 것...
하지만 지금의 CEO는 회사를 이끌어 나가려면 일 잘하는 사람이 필요하고, 경아 님이 그 역할을 잘하니까 맡기되 조직이기 때문에 잡음 나는 걸 싫어하는 스타일 같습니다.
경아 님 회사의 인사시스템이 어떤지 잘 모르겠으나 대부분의 공공기관은 승진 대상 최소연수가 있고, 아무리 똑똑하고 합리적인 CEO라도 잡음을 최소 하려고 연공서열을 추구하더군요.
연공서열은 MZ세대는 물론, 특히 저 같은 여성들은 아주 극혐 하지만 제가 겪어본 CEO들은 거의 그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했어요. 그래서 정말로 일 많이 하고, 잘하는 직원들은 발탁인사나 특별승진을 활용하죠. 하지만 그렇게 부려 먹고 승진도 안 시켜주고, 본인이 한직으로 보낸 사람을 승진시키겠다고 말하는 지금의 CEO는 한마디로 경아 님을 이용한 것으로 밖에 안 느껴집니다.
그런데 능력 없는 현 팀장의 보직은 놔두고, 일은 경아 님에게만 시키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현 팀장은 아마 나이가 어느 정도 찼기 때문에 보직을 떼기도, 한직으로 보내기도 어려우니(욕먹기 싫어서), 그냥 놔두고 일도 잘하고 제일 만만한 경아 님한테만 업무를 몰아주는 것 아닐까요? 경아 님에게 지속적으로 보직을 맡으라고 하는 이유도 적법하게 일을 시키고, 책임을 지게 하려는 것 같습니다.
단, 승진은 예외라고 일부러 말하는 그 저의는 알 수 없으나, “내가 승진시켜 줄게 더 열심히 해봐.”하며 죽어라 일 시키고 나중에 승진 안 시켜주는 사람보다 조직 운영을 더 못하는 사람입니다.
대부분의 인사권자는 승진이라는 얄팍하고도 대단한 권력을 쥐어 잡고 경영을 하잖아요. CEO뿐 아니라 일개 팀장들도...
그리고 능력 없이 한직으로 쫓겨난 동료에 대해서는 화가 나고 약도 오르겠지만 신경 쓸 필요는 없을 것 같아요. 한직에 있는 동료는 엄밀히 말해 나 대신 승진은 아닌 것 같습니다. 같은 부서에서 업무를 하는 것도 아니고, 그건 CEO가 판단할 문제니까요.
다만 무능력한 현 팀장은 뭐랄까, 대신 일한 게 팀장이 시킨 것이 아니고 CEO가 편하자고 경아 님에게 몰아준 거 아닌가요?(경아 님도 속으로 CEO가 팀장보다 나를 인정해 주는구나 하며 우쭐하지는 않았을까요? 이걸 잘하면 승진도 시켜주겠지 하며... 저도 같은 경험을 했거든요.)
무능력한 현 팀장이 착하고 속이 있다면 스스로 많이 속상해야 하고, 자존심 상해야 하고, 경아 님에게 미안한 마음으로 CEO에게 경아 님을 승진시켜줘야 한다고 강하게 어필해야 하지요.
하지만 이도저도 아닌 사람이라면 그냥 내가 똥 밟은 거예요. 나보다 월급을 더 많이 받은 사람은 앉아만 있고, 나만 동동거렸으니...
그리고 인사팀장의 정체는 무엇일까요? 이 부분이 제일 궁금해요. 경아 님이 현 팀장 대신 각종 업무보고와 회의, 그리고 CEO와 주요 의사결정을 하는데, 왜 인사 문제만 중간에 인사팀장이 껴서 의견을 전달하는지 이해가 안 돼요. 그 회사 조직문화가 CEO와 대화할 때 인사문제는 철저히 배제해야 하는 것인가요?
CEO가 보직은 맡되 승진은 안 시키겠다고 인사처장한테 전달하라고 한 것도 말이죠.
저도 3급 선임차장일 때 부서장이 국회, 예산 등으로 외부 활동이 많아 조직, 기획, 이사회 등 업무는 담당자인 제가 대신 이사장과 결정했습니다. 그때 지금의 경아 님 상황과 똑같이 중간에 인사처장이 장난질해서 제가 크게 다친 적이 있거든요. 제가 겪은 모자란 남성들은 잘 나가는(일 잘하는) 여성들을 나의 경쟁상대가 아니어도 어떻게 하든 깎아내리려는 못된 습성이 있어, 중간에 이간질을 많이 하더라고요.
CEO는 경아 님을 승진시키고 싶지만 인사처장이 “아직 때가 안 됐다. 세평이 안 좋다.” 등등으로 차단할 수도 있으니까 그 부분을 한번 체크해 보세요.
마지막으로 CEO 얘기를 해보아요. 그분은 연세가 어떤지 모르겠지만 미성숙하신 것 같아요.
몇 년간 그분께 이용만 당하고 보상을 못 받은 것은 정말 화가 나고 속상하지만, 전적으로 인사권은 그분이 가지고 있어요.
그리고 올해 퇴직할 분인데, 아직 정년이 한참 남은 경아님이 누구 좋으라고 회사를 때려치워요? 어차피 공공기관장은 3년마다 교체되고, 팀장들도 주야장천 그 자리에 있는 게 아니잖아요. 더럽고 치사해도 참고 견딘 후 그걸 반면교사 삼아 내가 팀장이 되거나 더 높은 자리에 갔을 때 후배들에게 멋지게 해 주면 되죠.
절대 절대 들이받으면 안 돼요. 나이스하게 폼나게 들이받는 건 없어요. 제가 다 해봤어요. 저도 부서장 면전에 사표를 던지고 외국 가버리고(사표 수리 안 되어 붙잡혀 왔지만), 제가 승진하고 싶어서 CEO 방에 청탁하러 들어갔다고 소문낸 인사처장 찾아가 방문도 부셔보고(고의는 아니었음), 경아 님처럼 일한 사람이 아닌 다른 사람 승진 시킨다는 CEO한테 입바른 소리 했다가 역린을 건드렸다고 지방으로 유배도 가보고...
진짜 별 짓 다했는데, 세상은 안 바뀌고 성질 더럽다는 소문만 났어요. 그 프레임은 직장생활 평생을 쫓아다니더라고요. 나를 이용만 하고 나가버리는 CEO지만, 무능력해서 자기 팀원 하나 어필 못하는 팀장이지만, 속과 정체를 모르는 인사팀장이지만 누군가는 경아님에 대해 좋게 말하는 사람이 있을 거예요.
‘구전 마케팅’이라는 말이 있어요. 입으로 입으로 전달되는 입소문 말이에요. 저도 같이 근무했던 분들이 지방본부장으로 발령 가서 '본사에 일 잘하는 누가 있더라'하는 덕분을 많이 봤어요.
힘들어도 조금만 버티세요. 분명 좋은 날 올 거예요. 경아 님 능력을 스스로 굳건하게 믿으세요.
경아 님이 잘 되어서 후배들 키워주세요. 자존심 구겨져서 나가는 게 명예회복이 아니고, 나간다는 자체가 자존감이 땅바닥에 팽개쳐지는 거예요. 아시겠죠?
저와 거의 10살 차이 나는 것 같은데, 씹어먹을 XX들 하고 욕하면 좀 풀릴 거예요.
정답은 없어서 글을 읽고 마음이 좀 풀어지셨는지 모르겠는데 힘내보자고요.
주말에는 회사 생각 잊고 좀 걸으시고요. 또 연락 기다릴게요. 안녕!
2024. 1. 5. 여민 드림.
여민 님 안녕하세요?
보내주신 답을 여러 번 읽고 또 읽으면서 지금 상황에 대해 객관화하려고 노력했습니다.
정말 너무 신기하게도 마음의 위안이 되었고, 화도 많이 가라앉았습니다.
특히 저에 대해 "스스로 타인들이 나를 인정해 줄 것이라고 믿고..." 이 부분에서 탄식이....
정말 저는 묵묵히 일하면 남들이 알아서 인정해 줘야 된다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어쩜 그렇게 족집게 강사처럼 잘 파악하시는지 역시 여민님이세요.
얼굴도 모르지만 제 인생 멘토가 계신 것 같아서 너무 많은 위안이 되었습니다.
저는 장녀고, 회사에서도 여성상사가 없었기 때문에 지금까지 멘토링을 받아본 적도 없고 의지할 만한 누군가도 없었기 때문에 많이 외로웠던 것 같습니다.
조언 정말 감사드리고 기회가 된다면 언젠가 꼭 따뜻한 커피라도 대접하고 싶습니다.
그런 날이 오기를 바라며, 항상 건강하시고 멋진 나날 보내시길 기도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이메일은 이렇게 주고받았다.
생각해 보니까 나도 집에서 장녀이고, 회사에서도 멘토로 삼을만한 여성 선배가 없었다.
그녀가 나의 글을 읽고 어떤 판단을 할지는 모르겠지만 잠시나마 터놓을 상대가 되었다는 것만으로도 새해 초부터 좋은 일을 했다고 생각한다.
내가 명리학에서 ‘천을귀인(天乙貴人)’ 사주를 가지고 태어났다는데, 다른 사람을 위해 적덕(積德)했으니 이 또한 기쁜 일이 어디 있으리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