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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메로나 May 26. 2020

순대와 국수

할머니 미안해요


할머니 나 왔어


문 좀 잠그고 계시지 뭐 하고 있었어? 아이고야 함박웃음을 지으며 할머니는 반갑게 나를 맞이한다 손에 든 비닐봉지를 받으며 매번 뭐 이런 걸 사와 돈도 없으면서 그냥 오지..

별거 아냐 할머니 좋아하시는 순대 그리고 떡 주스 사 왔지


나는 정말 별거 아닌 것을 받자마자 입에 잘라 넣으며 또 그 이야기를 하는 시간이 살짝 부끄러우면서도 뿌듯하다

어렸을때부터 떡을 얼마나 좋아했는지 우리 어머니가 떡보야 떡보야 그랬지 아 순대 맛있겠다 우물우물 꿀떡꿀떡 몇 개 집으며 나에게 묻는다  배고프지 뭐해줄까


할머니~ 나 국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주방에서 뚝딱뚝딱 분주한 몸놀림도 아닌데 배고픔을 느낄만하면 뭔가 만들어져있다

너무 많이 말고~하며 부탁해도 많으면 남겨라는 말이 돌아온다 멸치한줌에 다시마뿐인데도 육수냄새는 근사하고 넉넉히 삶아낸 뽀얀 소면을 전문가처럼 리듬감있게 헹궈내는 할머니의 뒷모습은 자주 보아도 멋지다


 순식간에 고소한 냄새를 풍기며 계란을 얇게 부쳐내어 접시에 담고 잘 익은 김치를 도마에 썰어 설탕 조금 참기름 조금 넣으면서 꼭 간을 보라고 입에 넣어준다 엄지를 들어 올리며 맛있어 맛있어라고 답하면 이미 정신은 아득하다 깨도 빠질 수 없지

뭐든 부족하지 않게 수북히 올려준 국수를 입에 넣으면 씹기도 전에 맛이 확 퍼지고 허기가 사라진다 이북이 고향인 내 할머니는 이 놀라운맛의 국수를 이리도 빨리 푸짐하게 담아내고 어느새 마주 보고 앉아 과일을 깎아내고 있다

뜨끈뜨끈 국수가 목구멍을 넘어가면 이제야 하고팠던 이야기를 늘어놓는다 이런일이 있었는데 이러쿵저러쿵 지금 생각해보면 아무것도 아닌 일들 할머니는 연신 표정을 바꿔가며 재미나게 들어준다 할머니 그런데 정말 너무 맛있어 먹는 중간 감탄사는 잊지 않는다

왜 국숫집을 안했냐고 떼돈을 벌었을 텐데.. 하는 손녀의 단골 레퍼토리엔 항상 같은 대답.


손님들에게 너무 퍼줘서, 가난해 보이면 돈을 안 받아서 남는거하나 없을거라는 말을 하며 깔깔 소리내어 웃는다 그래도 해볼껄그랬나 아니다 난 그런 주변머리도 없는걸


아니 왜 할머닌 사람좋아하니까 이렇게 우두커니 앉아 티브이 보지 않으면 몸도 더 좋았을 거야

그러게 말이다 용기가 나질 않았어


피둥피둥 할머니 손은 두툼하고 피둥피둥
손목에 못생기게 꿰매진 큰 수술 자국을 보이며 수십번은 들었을 그 이야기를 또 시작한다

수혈을 얼마나했는지 죽다 간신히 살아난 그때..

난 아마 끔찍도 오래 살거야 깔깔거리며 낭랑한 목소리로 웃어제낀다 옛날 사람 같지 않게 큰 키는 덩치를 생각해서 오래전 샀을 긴 네이비색 아니 곤색 저지 원피스에 휘감긴다

젊은 사람들과 이야기 나누는걸 좋아한다
동네 엄마들과 골목어딘가에서 즐거웁게 웃는다 할머니 친구들은 없냐니까 노인들은 자식 자랑 재산 자랑 자랑만 해서 만나면 할 말이 없단다

 
할머니 나왔어 오랜만에 와서 미안해
할머니 고마워 미안해 사랑해

아흔이 넘은 쪼글거리는 노인을 생각하며 병실에 들어갔다 아이들을 키우느라 바빴단 핑계로 오랜만이었다

그러나 그런 내 말을 듣고 있는 건 내 할머니였던, 뼈에 살갗이 겨우 남아있는 앙상한 누군가.. 아니 무언가였다 음식을 먹을 수도 사람을 알아볼 수도 표현을할수도 살수도 죽을수도 없는 가녀린 무언가.. 의학적으로 숨이 붙어있는데 할머니의 영혼은 웃으면서 우리 뒤에서 말을 하고 있는 듯했다. 박물관에서 아이들과 본 미라와 색이 조금 다를 뿐


친정엄마가 오늘 친척들이 연명치료를 포기하기로 했다고 전화하셨다

다행이라고 말했다 누구도 그런 삶을 원하지 않는다 그런데... 그런데... 눈물이

 이제는 할머니가 좋았는지 할머니 국수가 좋았는지 할머니 두툼한 손이 좋았는지 할머니 출렁거리는 뱃살이 좋았는지 쿰쿰한 할머니 냄새가 좋았는지 할머니의 웃음소리가 좋았는지 모르겠다

순대 좀 사드셔
나 혼자 먹자고 사 먹기가 좀 그래 먹고 싶어서 일 인분만 주세요 할까 고민하다 에이 그냥 왔지


왜 순대가 얼마나 한다고 그냥 사 드셔 좀
에이 니가 이렇게 사 오잖아


할머니 순대 더 못 사줘서 미안해 미안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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