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레이다 Oct 26. 2017

군인들은 정말 걸그룹을 좋아할까

통제된 질서 속에서 존중되는 다양성

나는 기회가 될 때마다 군인들에게 걸그룹 선호도를 묻는다. 물론 개인적으로 진행하는 것이니 비공식적이고, 취재 중 만난 '일부' 장병들에게 물어보는터라 조사 결과에 대한 신뢰도가 높은 것도 아니다. 하지만 지극히 평범한 장병들을 대상으로, 전국 각지의 여러 부대를 돌아다니며 데이터를 쌓고 있다는 점에서 나름의 가치 있는 자료로 활용하고 있다.


취재나 기사 작성을 위해 걸그룹 선호도를 조사하는 것은 아니다. 내가 일하는 잡지의 독자 대부분은 20대 초중반 장병들이기 때문에, '그들은 어떤 생각을 하는지' '무엇을 궁금해하는지' 파악하는 작업은 내게 중요한 일이다. 장병들의 관심사는 잡지 속 각 섹션의 기획 방향을 잡는 중요한 요소 중 하나이니까. 걸그룹 선호도 조사 역시 마찬가지. 인터뷰이나 화보 모델을 선정하고 섭외할 때 이를 활용하기도 한다.


장병들과 처음 만나 어색함을 달래고 공감대를 형성하는데 '연예인' 이야기만 한 게 없다. 장병들을 만나면 "요즘 누가 인기 많아요?"부터 물어보는 게 순서가 되어 버렸다. 누구 노래가 좋고, 누가 연기를 잘 하며 예능에서는 누가 눈에 띄는지 말이다. 여러 장병의 입에 공통적으로 오르내리는 스타가 바로 인기의 중심이다.


걸그룹 못지 않은 호응 속에 공연 중인 트로트 가수


지난 여름, 대략 8월경으로 기억한다. 장병들에게 걸그룹 선호도 조사를 진행한 적이 있다. 정확히 말하면 여자 가수 인기 순위. 다 합쳐 100명이 채 되지 않는 인원에게 물어봤기에 전체 군인의 의견이라 할 수 없지만, 아주 낮은 정도의 표본 쯤. 상위권에 이름을 올린 TOP5는 트와이스, 레드벨벳, 러블리즈, 블랙핑크, 아이유. 이들은 꾸준히 장병들의 입에 오르내리는 팀이면서, 그 중 레드벨벳과 블랙핑크는 당시 음원 차트 상위권에 랭크되는 등 한창 활동을 이어가던 때다. 장병들의 걸그룹 선호도 결과는 대체로 음원 순위나 방송 활동 빈도에 비례한다.


역시나 걸그룹의 인기가 높았지만, 눈에 띄는 사실은 다른 장르의 가수(팀) 이름이 예상외로 많이 나왔다는 점이다. 걸그룹이 누리던 절대적인 인기를 다양한 스타들이 나누는 양상. 제시와 키썸 등 래퍼, 볼빨간사춘기나 옥상달빛 같은 인디 싱어, DJ소다 등이 대표적이다. 걸그룹 아닌 이들 '여가수'들의 인기는 어지간한 걸그룹 못지 않다. 내가 일하는 잡지에서는 여성 래퍼가 표지 모델에 선정되기도 했다. 취향의 다양성이다. 당연한 이야기.


우리는 여전히 걸그룹을 좋아한다.
하지만 인기가 집중되는 것은 아니다.


요즘 위문공연은 단지 위로를 당하는 것에서 벗어나, 참여를 통해 위로 주고받는 흐름으로 이어지고 있다


획일되고 통제된 질서 속에서 개개인의 다양성을 표현하고 또 존중한다. 요즘의 위문공연이 이런 현상을 잘 보여준다. 내 군 복무 시절, 오프닝부터 메인무대까지 노출의상과 섹시댄스로 가득했던 위문공연은 이제 찾아보기 힘들다. 최근에는 래퍼나 인디밴드가 위문공연에 초대되기도 하고, 트로트가수와 비보이팀이 무대에 오르기도 한다. (물론 메인은 걸그룹이다) 반응은 기대 이상이다. 여기에 장병들이 꾸미는 무대도 인상적이다. 많은 부대가 밴드 동아리 내지는 여러 취미활동을 지원하고 있어서 장병들로 구성된 밴드팀, 공연팀 등은 실력도 뛰어나고 동료 전우들의 반응도 좋으며 그 의미도 높은 편. 단순히 장기자랑이 아닌 '공연'을 펼친다.


장병들의 걸그룹 선호도에서 나타난 다양성은 위문공연의 흐름을 바꿔 놓았다. 걸그룹뿐만 아니라 다양한 장르의 가수들이 위문공연에 초대되는 이유다. 얼마 전 EBS의 한 토크 프로그램에서 군부대 위문공연을 두고 걸그룹의 성적인 부분에만 초점이 맞춰져 있다는 주장을 들은 적 있다. 걸그룹이 필요하다, 아니다. 뭐가 문제냐, 문제 맞다. 의견이 난무했지만 아쉬운 점은 시작부터가 잘못됐다는 점이다. 요즘 장병들은 각자의 다양한 생각과 가치관을 군 생활에 녹여내면서 더불어 함께 어우르고 있는데, 여전히 우리 사회는 '군인은 걸그룹에 환장해'라는 착각 속에 살고 있는 듯하기 때문이다.


군대라는 '사회'에 모인 군인들의 취향이 모두 다른데, '모든 군인은 섹시한 걸그룹을 좋아한다'는 전제에서부터 잘못됐으니 토론 자체가 유익했는지 의문이다. 군대를 가보지 않고서, 군인을 만나지 않고서 결론 내리며 평가하는 건 무리가 아닐까. 노출이 심한 의상을 입고 자극적인 안무를 선보인다고 군인들이 마냥 좋아하던 시기는 지났다. 요즘 군인들은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


여러 장르의 가수들이 위문공연에 초대된다


걸그룹을 좋아한다. 하지만 걸그룹만 좋아하는 것은 아니다. 걸그룹을 좋아하면서 다른 장르 음악을 즐겨 듣기도 한다. 걸그룹의 컨셉이 섹시인지 큐티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섹시는 하나의 컨셉일 뿐이다. 무슨 말인지 복잡하다. 바로 그 복잡함이 장병들의 생각이 아닐까. 군대도 하나의 사회이고, 그 사회의 구성원들 역시 다양성을 가지고 있다. 걸그룹에 대한 생각이 다양한 건 당연하다. 섹시하거나 귀엽거나, 파워풀하거나 감성적인... 걸그룹도 나름이거니와 발라드, 트로트, 힙합, 댄스 등 걸그룹 아닌 장르에의 선호 역시 다양하다. 한 마디로 정리할 수 없다. 그게 요즘 군대, 요즘 군인들의 취향이다.


군대라는 특수성을 지키는 강제 속에서
최소한의 다양성을 존중한다.
획일적인 명령은 다양한 성질을 활용할 때
더욱 강한 전투력을 낼 수 있다
매거진의 이전글 병영에서의 글쓰기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