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어진 후 아무 일 없는 듯 출근해야 하는 날
이별이 싫다. 다른 어떤 말로도 표현할 수 없다. 세상에 이별만큼 힘든 게 있을까 생각한다. 사랑은 누구나 할 수 있지만 이별은 아무나 할 수 없다고 말한다. 이별은 두 사람이 서로 사랑한 후에나 가능한 것이니깐. 어찌 보면 명백한 사랑의 증거이며, 그 상처를 극복한다면 그 후엔 좀 더 성숙한 사랑을 한다고들 한다. 그래 다 맞는 말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별은 싫다. 하지 않을 수 있다면 영원히 안 하고 싶다. 정말!!!!
계절의 여왕 5월. 1년 중 가장 아름다운 봄날에 나는 이별했다. 어제까지 사랑을 말하던 사람이고 이유를 알 수 없는 이별이었다. 이전 라디오에 김동률이 나와서 '농담'이라는 노래를 소개하며... 헤어지자고 말하는 여자 친구의 말이 농담인지, 아니면 어제까지도 사랑한다고 했던 말이 농담인지 알 수 없었다는 그 말이 내 상황이었다. 내가 이별했다는 것이 실감 날 리가 없었다. 모두 그대로인데 대체 어디서부터 잘못 된 것인지 생각의 늪에서 빠져 허우적거렸다. 불면의 밤이 시작되었다.
헤어진 뒤 가장 힘든 일은 아무렇지 않게 회사에 출근해야 한다는 것과 매일 밤이 찾아온다는 사실이었다. 일터의 시계가 내 감정의 시계와 맞춰줄 리 없었다. 시시각각 처리해야 하는 메일들이 쏟아지고, 받아야 하는 전화가 걸려왔다. 회의와 미팅은 한치의 착오도 없이 촘촘하게 달력에 자리 잡고 있었다. 지금 내 상황을 말하고 빠질 수도 없었고, 일시정지 버튼을 누르고 감정을 추스를 수도 없었다. 회사였고 일이었다. 아무 일 없는 척했지만 늘 곁에서 보던 동료들은 표정만으로도 무슨 일이 있다는 것을 알아차리고 "요새 무슨 안 좋은 일 있어? "라며 말을 걸어왔다. 속 시원하게 털어놓을 수도 없고 장난으로 넘길 수도 없었다. 티 내지 않으려 아무리 노력해도 점심밥이 넘어가지 않았고 대화 속에서 웃고 떠들 수 없었다. 가까스로 버티는 낮을 보내고 내 방에 돌아오면 더 무서운 밤이 찾아왔다. 어떻게든 잠들려 애썼지만 꿈에서도 이별은 계속됐다. 내가 가장 약해지는 시간이었다.
싱가포르에서 살고 있는 승무원 친구와 이전부터 계획한 북유럽 여행이 1주일 남은 시점이었다. 회사에 갈 기분도 아니었지만, 해외여행 갈 상황은 더욱 아니었다. 내 월급과 금쪽같은 휴가를 모아 떠나는 여행이었지만 여행이 아쉬운 게 아니었다. 지금 집 밖으로도 한 발자국 못 나가는 내가 이 상태로 해외를 누빈다는게 말이되는가 ㅠㅠ. 친구에게 전화를 걸었다. 남자 친구와 헤어졌어 미안하지만 여행을 못 갈 것 같다고 말했다. 수화기 넘어 친구의 목소리가 날아왔다 "여행 다 취소해도 돼. 미안해하지 마 돈, 시간 하나도 안 아까워. 정말 취소해도 괜찮은데. 언니가 여행을 망칠 것 같다고 했잖아. 내가 다녀보니깐 망치는 여행은 따로 없어, 망쳤던 여행은 오히려 너무 욕심 냈던 여행이었어. 여행 가서 아무것도 안 해도 돼. 힘들면 그냥 호텔방에서 안 나와도 돼. 괜찮다면 가자" 오랜 시간 같이 준비했고 나만큼 이 여행을 기다렸을 친구였다. 떠나기 며칠 전 전부 취소하자는 나에게 준비한 시간과 위약금 따위는 하나도 아깝지 않다고 말해주고 있었다. 연인은 떠났지만 이런 친구가 아직 내 곁에 있다는 사실에 조금 숨통이 트이는 것 같았다. 하룻밤만에 마음을 다시 먹고 짐을 싸서 북유럽으로 떠났다.
그렇게 덴마크 코펜하겐에 도착했다. 때는 6월로 접어들며 북유럽 사람들이 1년 내내 기다린다는 여름이 시작되고 있었다. 듣기만 해도 알록달록한 레고와 안데르센의 도시였다. 예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장난감 같은 건물들이 줄 서있고. 길게 뻣은 북유럽 사람들의 다리로 휘휘 저어 나아가는 자전거는 활기 그 자체였다. 기차역에서 나오자 유럽 동화책 같은 티볼리 놀이동산이 눈 앞에 펼쳐졌다. '나는 너무 슬픈데 여긴 너무 예쁘구나'란 생각을 떨쳐낼 수 없었다. 여기서 노는 건 할 짓이 아니었다. 난 정말 친구가 올 때까지 호텔에서 나오지 못했다. 제일 높은 다락방에서 잠들지 못하고 새벽 5시 해가 교회탑과 지붕을 물들이며 내 방까지 들어오는 것을 멍하게 바라봤다. 더없이 완벽한 날씨였고 도시는 내가 좋아할 것들로 가득 차 있었다. 하지만 마음이 슬퍼서 어떤 욕망도 의지도 생기지 않았다. 결국 이렇게 돼버린 여행도 비극 같았다.
이 비극은 스웨덴으로 가면서 더욱 커졌다. 스웨덴 거리에는 이 도시에서 무엇을 해야 자신이 행복한지 잘 알고 있는 사람들로 가득차 있었다. 흰머리가 지긋한 할머니는 비키니를 입고 일광욕을 즐기고 있었고, 공원에서 자유롭게 뛰노는 개까지 나보다 행복해 보였다. 유모자를 끄는 아빠들은 외제차를 끄는 아빠들보다 멋졌다. 강가에 앉아 이야기를 나누는 사람들의 뒷모습도 부러웠다. 나도 저들 중 일부가 될 수 있었는데... 지금은 그게 가능할까 싶을 만큼 바닥에 가 있었다. 너무나도 맑고 반짝이는 날씨와 도시에 있다 보니 꽉 눌러둔 내 심연과 더 간극이 벌어지는 느낌이었다. 설명하기 어렵지만 뭐랄까 '세상은 이토록 아름답지만 나는 아닌 느낌'이었다. 게다가 물가가 높아 뭐든 다 비쌌다. 음식도 맛이 없었다. 지금 슬퍼서 입맛이 없는건지 비싸서 맛이 덜한건지 알 수 없었다. 그러면서도 ‘에잇 모르겠다’하며 돈을 펑펑 쓰지도 못하는 나의 현실이 더없이 처량하게 느껴졌다.
여행의 마지막 도시는 핀란드 헬싱키였다. 스톡홀름에서 17시간 동안 영화 '타이타닉'처럼 생긴 크루즈를 타고 가는 일정이었다. 비용 때문에 우리 방은 영화 속 가난한 디카프리오 방 같은 아래층 방이었다. 창문이 없어서 깜깜했고 밖이 보이지 않아 도착했는지 알 수 없었다. 도착 알림 방송과 함께 우리는 세상 밖으로 나왔다.
핀란드는 참 신기한 나라였다. 버스를 타고 도시로 들어서는데 영화 '카모메 식당'에서 나왔던 주황색 바닷가 마켓이 보였다. 낮고 잔잔한 시장 위로 갈매기가 날고 있고, 사람들은 사고팔고 아침을 먹고 있었다. 너무 크지도 복잡하지 않았다. 대도시 스톡홀름과는 다른 분위기였다. 덜 도시적이었고 더 여유가 있었다. 사람들의 모습도 덜 세련돼 보였지만 대신 좀 더 푸근해 보였다. 뭔가 완벽한 도시보다 조금씩 부족해 보였지만 그런 점들이 묘하게 위로가 되었다. 멍하니 카모메식당 주인공 사치에도 이래서 헬싱키에 와서 식당을 열었을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짐을 풀고 나왔더니 광장에는 순백색의 헬싱키 대성당이 자리 잡고 있었다. 파란 하늘과 흰 성당을 올려다보는 것만으로도 이루 말할 수 없는 평화가 몰려왔다. 올라가 촛불을 밝히고 기도라는 것을 했다. 모든 걸 되돌리게 해달라고 하고 싶었지만, 지금 이 상황이 다 지나가게 해달라고 기도했다.
친구와 바닷가 시장으로 걸어가 연기를 쫓아가니 큼직한 야채들과 연어를 구워서 팔고 있었다. 북유럽에선 늘 걱정되던 가격조차 저렴했다. 한 접시를 받아 간이 천막 아래에서 배를 채우기 시작했다. 마음껏 먹기엔 뭔가 불편했던 레스토랑이 아닌 시장에서 뭘 먹으니 깊은 곳의 허기가 채워지는 느낌이었다. 맛은 중요하지 않았다. 그저 지금은 나도 뭘 좀 먹어야겠다는 의지가 샘솟아 한 접시를 싹싹 비워냈다.
무엇보다 제일 큰 위로가 된 것은 바로 '해가지지 않는 백야의 핀란드'라는 것이었다. 이별한 뒤 가장 큰 두려움은 오늘도 어김없이 밤이 찾아온다는 사실이었다. 그런 밤이 오지 않다는 것은 마법과 같았다. 낮이 이성의 시간이라면, 밤은 감성의 시간이었다. 어두운 밤이 얼굴을 내밀지 않으니 살 것 같았다. 밤 9시 모든 상점들이 문을 닫았지만 여전히 환해서 우리는 공원을 찾아갔다. 누군가가 '슬플 때 달려가서 울 수 있는 숲이 있으면 좋겠다'라고 한 말이 생각났다. 숲으로 들어서는 순간 알 수 있었다. 슬플 때는 정말 당장 숲으로 달려와야 했다는 것을...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나무 사이로 걸었다. 내 키의 몇십 배는 되는 나무들도 내게 아무 말도 걸지 않았다. 이곳에선 슬픈 표정을 지어도 되고 어떤 말을 해도 될 것 같았다. 기쁨도 슬픔도 여기에 비우면 될 것 같았다. 잔잔한 호수를 바라보며 앉았다. '휘바 휘바' '잘했어 잘했어' 왠지 모르게 오늘 하루를 버틴 나에게 이 말을 해주고 싶었다. 숲의 나무와 분홍빛으로 물드는 호수도 나에게 그렇게 말해주는 느낌이었다. 다시 한번 나지막이 내게 말해주었다. '휘바 휘바' 눈물을 흘리지 않았지만 속으로 더 크게 울고 내 몸이 깨끗하게 비워진 느낌이었다. 아무런 조건 없는 위로였다. 잘잘못을 따지지 않고 무조건적으로 주어지는 치유였다. 달라진 건 아무것도 없었지만... 그저 인생엔 이런 시간도 있다는 사실이 받아들여졌다. 백야의 핀란드는 그렇게 어두운 밤도 낮과 다르지 않은 인생의 일부라는 것을 내게 말해주고 있었다.
길고 긴 겨울을 보내는 핀란드 사람들은 1년에 단 2개월 찾아오는 여름을 기다리며 산다고 한다. 핀란드의 가장 흔한 이름 '마리'와 옷이라는 의미의 '메꼬'를 합쳐 만든 '마리메꼬'라는 브랜드는 여름을 기다리는 이 나라 사람들의 바람을 담은 원색적이고 독특한 무늬의 옷과 제품을 만들어 내고 있었다. 계절 중에 여름을 가장 사랑하는 나였기에... 저 의미를 알게 된 후 나는 마리메꼬를 더욱 사랑하게 되었다. 숲에서 나온 나는 다음날 헬싱키 마리메꼬 매장에 가서 원피스를 한 벌 사 입었다. 긴 겨울을 견디면 다시 여름이 찾아온다는 평범한 진리를 나에게 선물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평소 매니큐어를 바르지 않은 내 손을 바라보던 친구는 기분 전환 삼아 좋아하는 연보라색 매니큐어를 발라주겠다고 말했다. 평소 같으면 거절을 했겠지만... 매니큐어 바른 손을 싫어하던 남자 친구 생각이나서 나는 바로 손을 내밀었다. 나 조차도 어색한 매니큐어 바른 손으로 마리메꼬 원피스를 트렁크에 담아 집으로 돌아왔다.
여행 후 방문을 열고 나가니 여행가방에 들어 있던 내 빨래는 깨끗하게 널려있고, 달그락달그락 반찬 만드는 소리 사이로 엄마의 뒷모습이 보였다. "이제야 일어났냐"는 잔소리로 시작되지만 식탁엔 갓 지은 밥에 엄마가 키워서 만든 거라는 아욱국과 깻잎이 자리 잡고 있었다. 따끈한 삼겹살 찜을 김치에 싸 먹으면 맛있다며 내 쪽으로 밀어줬다. 나의 슬픔의 이유를 다 알고 있는 엄마는 아무것도 모른 척 그저 밥을 차려 주셨다. 크게 한 술 떠 입에 넣으니 '그래, 이거면 될 것 같다'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별이 찾아와도 내 곁에 남아있는 것들은 명확했다.
다시 월요일. 잠시 보통 내가 월요일엔 몇 시 버스를 타고 출근했더라 셈이 필요했던 아침이었다. 그것도 잠시, 회사 시계는 여전히 착착 잘 돌아가고 있었다. 여행에서 돌아온 나를 향해 사람들은 더 이상 "안 좋은 일 있냐"라고 묻지 않았다. 대신 "여행은 어땠어"라고 물었다. 나를 기다리고 있는 1,560통의 메일은 쉰만큼 다시 열심히 일해야 한다고 말해주고 있었다. 내 책상을 바라봤다. 변함없이 앉아서 일할 수 있는 내 자리가 있다는 사실이 새삼 고맙게 느껴졌다. 여전히 이별의 이유를 알 수 없었고, 불쑥 후회와 미련이 찾아들고 밤은 여전히 두려웠지만 때론 친구를 부여잡고, 때론 엄마 밥을 먹으며, 때론 야근조차 고마워하며 하루를 견뎠다. 다 지나갈 거야. 나는 그냥 이렇게만 지내면 된다고 토닥여주었다. 암 그렇고 말고! 이렇게 하루가 갈 것이고 한 계절이 지날 것이다. 그럼 난 다시 찬란한 여름을 맞이 할 거니깐. 긴 겨울을 보내고 여름을 맞이하는 핀란드 사람들처럼.
+ 덧붙이는 글
이별 후 떠난 여행에서 핀란드 헬싱키만큼 위로가 된 책이 있었어요. 떠나는 날 공항에서 친구가 안겨준 책이었는데... 공지영 작가의 '네가 어떤 삶을 살든 나는 너를 응원할 것이다'라는 책이었어요. 공지영 작가가 엄마의 입장에서 딸에게 이야기 하 듯 쓴 글이었는데, 비행기에 타서 책을 여는 순간 저는 친구의 의도에 무릎을 탁 쳤지요. 첫 번째 소제목이 '잘 헤어질 남자를 만나라' 였거든요. 여행 중 잠이 오지 않던 밤 저 책을 부여잡고 견뎠습니다. 지금도 누군가가 헤어졌다고 하면 저 책을 선물해줍니다. 혹시 인생에 이별이 찾아왔다면 이 책을 한번 읽어보세요. 이별을 했다면 무조건 위로받아야 하니까요. 아니면 치유의 도시 핀란드 숲으로 가는 것도 방법이 될지 몰라요. 다 비우고 나면 숲이 말해줄 거예요. "휘바 휘바. 잘했어 잘했어."
'어떤 사람에게 생겨난 특별한 슬픔을 우리는 다 가지고 있지 않지만 어떤 사람에게 있는 특별한 사랑과 행복 혹은 숭고함은 모두에게 이미 공평하게 나누어져 있다'
-네가 어떤 삶을 살든 나는 너를 응원할 것이다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