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휴가를 누구에게도 알리고 싶지 않은 날
직장인으로 살면서 내 마음의 출처와 원인을 나 자신도 알 수 없을 때가 가끔 있다. 그중 하나가 '하루 휴가의 무게'에 대한 심리인데 "저 다음 주 금요일 휴가 좀 낼게요"라고 말했을 때 어디가? 뭐해?라는 상사와 동료의 질문에 "네, 엄마(아빠) 생신이세요. 네 밀린 일 좀 보려고요. 그냥 좀 쉬려고요"등의 답변을 할 때와 "네 저 (해외)여행가요"라고 대답할 때의 무게가 다른 이유를 알 수 없다. 물론 더 무거운 것은 여행 쪽. 똑같이 주어진 휴가를 쓰는 것인데... 왜 가족 생일이나, 은행 업무나, 휴식보다 더 놀고 휴가도 더 길게 쓰는 기분인 걸까. 국내여행도 아닌 해외여행은 추가 수화물처럼 부담도 추가된다. 그래서 똑같은 휴가를 말함에도 한 다섯 번쯤은 더 생각하고 요리보고 저리보고 둘러 둘러 말을 꺼내기도 한다.
나에겐 누구에게도 휴가를 알리고 싶지 않은 날, 조용히 하루 이틀 정도 휴가를 내고 아무 일 없다는 듯 떠날 수 있는 곳이 있다. 바로 대만 타이베이다. 일단 비행기를 타면 2시간 30분이면 도착할 수 있다. 저가항공도 취항해서 비행기 표도 적당한 가격에 구하기 쉽다. 물가도 우리나라와 비슷하거나 조금 저렴하고 날씨는 늘 더 따뜻하다. 맛있는 음식과 주전부리도 많고 서울의 지하철과 비슷한 대만 지하철을 타면 웬만한 곳들은 다 갈 수 있다. 하지만 생각해보면 서울과 크게 다를 것도 없다. 지하철로 연결된 바쁘고 복잡한 도시이며, 비슷한 아시아 사람들의 얼굴이나 풍경도 익숙하다. 관광지라 해도 우리나라 명동이나 광화문 경복궁이 떠오른다. 유명한 대만 식당 딘타이펑은 진작에 서울에도 들어왔으며, 여행 가서나 사 오던 대만 디저트 펑리수나, 누가 크래커도 국내 편의점에서 사 먹는 시대가 되었으니 굳이 여행으로 가야 하나 싶기도 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이 평범한 도시를 사랑하는 이유는 '영화'라는 마술 때문이다.
'말할 수 없는 비밀, 타이페이 카페스토리, 여친남친, 그 시절 우리가 사랑했던 소녀, 나의 소녀시대'등 대만 영화가 없었더라면 타이베이는 그냥 평범한 도시였을 것이다. 하지만 영화를 보고 나면 이곳은 나에게 풋풋한 첫사랑의 도시, 교복과 자전거의 나라, 잠시나마 학창 시절로 돌아가는 도시가 된다. 똑같이 밥을 먹고 차를 마시고 길을 걸어도 반복되는 일상과 다른 영화의 시간이 찾아오는 것이다. 같은 도시가 달라지는 진짜 매직이다!
날씨가 쌀쌀하던 어느 월요일 난 조용히 땡처리 항공권을 파는 사이트에 접속해 타이베이행 비행기표를 샀다. 크게 준비할 게 없는 만큼 크게 걱정할 것도 없는 도시. 숙소 역시 엄청난 차이가 있거나 반드시 예약에 성공해야 하는 곳이 따로 있지 않다. 적당한 가격의 표를 사고, 너무 크지 않은 적당힌 짐을 싸서, 큰 기대 없는 적당한 마음으로 그저 떠나기만 하면 시작되는 여행이다. 출발 전날까지도 적당히 부담 없이 동료들과 저녁에 반주를 하고 집에 돌아왔고 다음날 아침 시차도 없는 타에베이로 출근하듯 나와 날아갔다.
짐을 풀고 도시로 나왔더니 이른 점심이다. 느긋하게 동네 시장으로 걸어 들어가 찜통 김 속에서 푹푹 쪄지는 이름 모를 만두를 한 접시 시켜서 먹었다. 장인의 만두도 아니요. 몇 대 맛집도 아니지만 갓 쪄낸 윤기가 흐르는 만두를 보면 그냥 먹어도 우리나라 웬만한 만두보다 맛있다는 확신을 든다. 배를 채우고 영화 '타이페이 카페스토리'의 배경이 된 두자매카페에 가서 커피를 한 잔 하기로 한다. 주소와 정보를 검색해보니 검색 결과조차 참 적당한 게 아닌가. 너무 많이 쏟아지지도 않고 그렇다고 아예 없는 것도 아닌 적당함. 나같이 영화를 좋아하는 몇몇이 남겨준 정보를 따라 그냥 동네를 좀 헤매기로 마음 먹으면 될 일이다.
카페를 찾아가는 길. 학교를 만나면 어김없이 목적지를 잃고 길을 새게 된다. 체육복을 입은 학생들이 운동장에 모여있는 풍경을 바라보며 '역시 대만은 학창 시절 느낌이야...'라고 생각한다. 이 순간은 영화가 만들어낸 마술이 시작된다. 어딜 여행가도 학교와 학생들을 흔하게 만날 수 있지만 이곳의 학교와 학생들에겐 영화라는 묘약이 더해져 이 평범한 풍경이 마치 내가 꼭 찾던 풍경을 만난 것 같은 반가움을 들게하는 것이다. 유년시절로 돌아간 듯 마음이 말랑해지면서 운동장에서 그네를 탔다. 이렇게 기분 좋은 그네를 하루에 한 번도 타지 못하고 사는게 얼마나 별로인가라는 생각이 오르락 내리락 거린다. 뺨과 머리를 스치는 기분 좋은 바람과 운동장에서 전해지는 학생들의 웃음소리에 내 마음도 함께 일렁 거린다.
비슷한 시간 아마 한국도 점심시간이 찾아왔다보다. 딩동 딩동 해장 점심이나 같이 하자는 메시지가 들어온다. 나는 조용히 톡방에 메시지를 던졌다. "나 타이베이야” 친구는 내게 묻는다. "너 어제 우리랑 저녁 먹지 않았냐... 거긴 언제 갔어?" 나의 금요일 휴가를 누구에게도 알리지 말라는 작전이 성공한 듯 피식 웃음이 나왔다. "오늘 아침에 비행기 타고 왔지. 나 지금 그네 탄다. 날씨가 너무 좋아" 대화를 마친 친구들은 콩나물국밥 한 그릇씩 하러 단골 가게에 찾아갔으리라. 뜨근한 콩나물밥에 김을 올려 먹으며 오늘만 지나면 주말이라는 이야기를 하겠지. 그런 금요일도 제법 괜찮겠지만...그네를 타고 있는 오늘 지금의 점심 시간이 퍽이나 마음에 든다.
그렇게 샛길로 새던 난 동네를 조금 헤매고 영화 속 카페를 찾았고 곧 만나게 될 친구에게 줄 생일 카드를 썼다. 저녁엔 이 도시 사람들에 섞여서 중정기념당(타이완 민주 기념당으로 이름이 바뀜)을 걸었다. 영화 '여친남친'에서 친구들이 광장에 모여 데모하던 장면이 생각나는 밤이었다. 산책하다 뒤를 돌아보면 도시 느낌의 높은 고층 빌딩과 전통적인 기와 건물이 교차되어 광화문 한 복판 경복궁을 떠오르게 만들었다. 기념당 앞에서 달과 별과 정문과 극장을 바라보며 그 누구보다 경복궁 산책을 좋아하지만, 오늘만큼은 지금 이 찬란한 밤의 풍경을 좀 더 담아가고 싶다고 생각했다.
다음날 만난 친구와 난 흥분을 감출 수 없었다. 영화 '말할 수 없는 비밀'에 나온 음악고등학교에 찾아가는 날이었기 때문이다. 지하철을 타고 끝까지 올라가 버스를 타고 주인공 계륜미가 자전거를 타던 바닷가 마을을 지나 학교로 걸어 올라갔다. 여권을 맡기고 들어선 학교 입구에서 대화를 나누게 된 선도부 학생들과 사진을 찍다보니 우습게도 드라마 겨울연가를 보고 한국 준상이네 집을 찾아오는 일본인 아줌마들의 마음이 이해가 갔다. 학교 산책은 나에게 영화 산책과 같았다. 야자나무 늘어선 본관의 모습도 영화 그대로였고, 두 사람이 귓속말을 나누던 아치형 복도도 반가웠다. 천식에 걸린 여자 주인공에게 가져다준 사과 15개가 책상 서랍에 들어 있을 것 같았다. 흥분한 나는 친구에게 여주인공 계륜미가 "한 손으로 피아노 치는 거 좋아하나 봐"라고 하자, 주걸륜이 "그래야 다른 한 손으로 네 손을 잡을 수 있지"라고 말한 대사를 최대한 오글거리게 흉내 내며 친구를 웃기고 나도 깔깔거리며 웃었다. 마치 그 순간만큼은 이 학교 학생이 된 것 같은 근심 없는 유년의 웃음이었다.
주말엔 버스를 타고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의 배경이 된 지우펀을 찾아갔다. 오후에 도착한 우리가 할 일이라고는 저녁에 붉은 등에 불이 들어올 때까지 기다리는 것뿐이었다. 찻집에 들어가 하염없이 물을 끓이고 차를 마시고 또 마셨다. 여기서 이 찻집보다 대만 여행과 어울리는 곳이 있단 말인가. 우리의 작은 찻잔은 한국에서는 잘 마시지 않는 차들로 비워지고 채워지느라 분주했다. 차를 타고 양쪽의 이야기도 흘렀다. 영화 속 이야기에 들어와 우리의 이야기가 생겨나는 시간이었다. 홍등에 불이 들어오자 복잡한 사람들 속에서도 아이처럼 신나 하며 사진을 찍었다. 때론 영화 속 풍경을 보는 것만으로도 평범한 우리의 일상이 영화 같아진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떤 도시를 더 아름답게 보기 위해 난 전망대에 오르는 것을 좋아한다. 늘 전망대에 오를 때면 하루끼의 '조금 멀리서 보면 대게 모든 것이 아름다운 법이지'라는 문장을 생각한다. 도시의 기쁨도 슬픔도 모두 한줄기 빛이 되어서일까 정말 도시는 멀리서 보면 대게는 아름답다. 일상으로 복귀를 알리는 마지막 날 밤은 타이베이 101 빌딩 전망대에 올라갔다. 나에게는 영화 같은 여행지라도 누군가에겐 삶의 터전이고, 나의 서울처럼 힘겨운 일터일 것이다. 지금도 사람들의 웃음과 눈물이 흐르고 쌓일 도시를 여행자의 특권으로 그저 멀리서 바라봤다.
대만 영화인 '나의 소녀시대'에 이런 대사가 나온다.
"그 누구도 나에게 말한 적이 없다.
원래 어른이 되면 별 볼일 없는 일을 하고
별 볼일 없는 연애를 하며
별 볼일 없는 삶을 살게 될 수도 있다는 사실을"
정말 그러했다. 교복을 벗고 어른이 된다는 것은 별 볼일 있는 인생을 향해가기보다. 별 볼일 없는 인생으로 가는 게 더 쉬워 보였다. 그렇다 해도 인생은 원래 별 볼일 없는 거라며 그냥 두면 안된다. 흘러가는 대로 먹고, 자고, 일하면서 매일 똑같이 살기에 인생은 너무 아깝다. 언제나 영화 속 주인공처럼 살 순 없겠지만, 내 영화 속 유일한 주연인 내가 매일 똑같은 풍경과 상황 속에서 쳇바퀴 돌듯 살아가게 두고 싶지 않다. 평범한 금요일 회사 앞 식당이 아닌 타이베이에서 점심 한끼 할 수 있는 인생이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그게 꼭 타이베이가 아니라도 괜찮고, 반드시 근사한 식사일 필요도 없다.
다음 달 출발하는 타이베이행 비행기 표를 사두었다. 요번엔 좀 빠르게 산 편이다. 여행을 기다리며 그동안 못 본 영화를 몇 편 볼 생각이다. 요번엔 뭐할까 생각하다 보니 또다시 영화 '그 시절 우리가 사랑했던 소녀'처럼 소원을 쓴 풍등을 날려볼까 싶기도 하고 '나의 소녀시대'에서 주인공 둘이 머리를 맞대고 공부하던 홍차 가게에도 찾아가 보고 싶다. 그렇게 별 볼일 없이 반복되는 내 일상이 영화가 되는 금요일을 나는 조용히 기다린다. 휴가를 내고 타이베이에 내려 만두 한 접시를 시켜 먹으며 생각하리라. 가끔은 훌쩍 이곳에 와서 점심을 먹는 금요일이 있어도 충분히 좋을 내 인생 아닌가!
+ 덧붙이는 글
대만에 가서 뭘 할까?라는 친구들에게 늘 영화를 추천해주지만. 많이들 보고 가는 것 같진 않았어요. 여행 가기 전엔 늘 바쁘고 시간이 부족한법이죠. 영화까지 보며 여행을 준비하란 말이 가끔은 사치처럼 들릴 수 있을 것 같기도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타율 낮은 영화 추천을 오늘도 포기하지 않고 시작합니다. 그냥 평범한 도시를 특별한 도시로 만들어주는 마법의 영화들. 한 편 정도는 보고 가세요. 그래도 좋을 인생이니까요.
말할 수 없는 비밀
: 벌써 10년 전 영화. 영화판에서 일할 때 관객들 반응이 너무 좋아 엄청난 시사회를 했던 기억이 난다. 내가 본 대만영화 중에 평점도 가장 높다. 대만 영화하면 떠오르는 학창 시절 + 첫사랑 + 교복 + 자전거 + 피아노가 종합 선물세트로 등장하며 로맨스에 판타지까지 감미되어 있다. 주걸륜 계륜미라는 대만 탑 배우들과 음악학교에서 펼쳐지는 이야기인 만큼 피아노 장면도 인상 깊다. (특히 배틀 장면) OST를 플레이리스트에 담아 가자.
타이페이 카페스토리
: 성격도 외모도 다른 두 자매가 카페를 열게 되면서 이야기가 시작된다. 돈 대신 물물 교환으로 사연 있는 물건들이 카페를 통해 오가게 되며 사람들의 이야기가 더해지는 영화다. 개인적으로는 대만 여행 전에 보면 좋을 영화 1순위로 꼽을 만큼 여행과 선택에 대한 이야기도 담고 있다. 방문했을 때 카페 대문과 내부가 그대로라 반가웠던 기억이 남아있다. 카페 안에는 이 영화의 포스터가 붙어있었다.
그 시절 우리가 사랑했던 소녀
: 가진동, 가진동!!! 그 시절 우리가 사랑했던 소년을 만날 수 있는 영화라고 난 생각한다. 이런 소년이라면 누구라도 사랑하지 않을 수 없으리라. 마른 몸, 순수한 눈, 빠박이로 밀어버린 머리, 이성보다 감성이 앞서고 누구의 마음도 알 수 없는 그때 '그 시절 너를 좋아했던 내가 나도 좋아'라는 대사로 대만 청춘영화에 정점을 찍어준다.
나의 소녀시대
: 제2의 가진동이라고 불리는 왕대륙이 나오는 영화. '그 시절 우리가 사랑했던 소녀'의 코믹버전이라고 볼 수 있을 만큼 이 영화 역시 학창 시절 + 첫사랑이라는 대만 흥행작들의 룰을 그대로 가져간다. 정말 촌스럽고 유치하리만큼 웃긴 게 이 영화만의 특징이다. 실소로 시작된 웃음이 점점 커지고 유치한 대사가 마음을 파고든다면 이 영화에 빠져든 것이다.